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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Apr 14. 2022

퇴사에 관한 고찰

거의 8년 전 일이지만, 나는 내가 도하에 도착했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눈을 질끈 감게 만들었던 강렬했던 태양.

한껏 들이마신 숨에 느껴졌던 뜨거운 사막의 열기.

다시 눈을 뜨자 내 시야에 들어온 이국적인 느낌의 야자나무들. 

그리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전통의상을 입은 아랍 사람들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26년 살던 한국을 처음 떠난 나는 그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중동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나 할까...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내 코 끝에 어떤 냄새가 와닿았는데, 먹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엄청 맛있을 것만 같은 고기 냄새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중동 특유의 향이라던데, 고기 냄새인 줄 알고 어떤 요리일까 생각하고 있었다는 나의 말을 듣던 동기 언니는 박장대소하며 내게 말했다.


 “너는 여기 오래 있겠다. 푸하하하하. 딱 보니까 잘 맞아서 오래 있겠어.” 

그리고 그 말은 진짜로 현실이 되었다.




2014년부터 도하에 살면서 참 많은 동료들과 친구들의 퇴사를 보았다. 

사실 승무원은 매번 처음 보는 크루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번 비행만 끝나면 다시 볼 사이가 아니기에, 오늘이 누군가의 마지막 비행이라고 하면, 그동안 수고했다며 앞날의 행운을 빌어주는 것으로 끝나고는 하지만, 지상직 시절, 전쟁터 같은 공항에서 하루 종일 붙어서 같이 일했던 동료가 퇴사한다는 소식은 내게는 꽤 커다란 마음의 상실감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 퇴사라는 것이 언젠가는 반드시 내게도 일어날 일이기에,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다. 다만 다음의 여정으로 가는 길까지의 시간적 공백이 뜨지 않기를 바라고, 도망치듯 가는 퇴사가 아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서의 퇴사를 바라는 욕심이 있다. (그렇다. 나는 욕심이 많다. 나도 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내게 오는 ‘퇴사의 적절한 타이밍’의 시그널을 잘 캐치하고 싶다. 아마 이것이 지상직 시절, 내가 한동안 퇴사하는 동료들에게 언제 퇴사를 결정했는지 물어봤던 이유일 것이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답변은 이것이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싫어지는 거야. 일하는 것도, 출근길도 심지어 퇴근길도 싫어지더라. 카타르에 있는 아무리 예쁘고 좋은 걸 봐도 좋지 않더라고.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게 느껴졌어. 그때 깨달았지. 아 떠나야겠구나.” 그렇게 그녀는 사직서를 내고 떠나버렸다.


그 후 나는 내 출퇴근 시간을 잘 살피기 시작했다. 나도 출퇴근이 싫어지면 그만둬야지. 그런데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출근길에 마주하는 코니쉬(도하의 해변가)는 너무 좋더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줄로 도열해 있는 야자나무들을 보노라면 “아, 좋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도하는 사막이지만 바다를 끼고 있다. 모래바람과 바닷바람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지상직 시절 내내 나에게 코니쉬는 출퇴근길 힐링 장소였다.




물론 나도 누구나 겪는다는 3.6.9법칙을 피해 갈 수는 없었지만 (입사 3,6,9개월 차에 퇴사 욕구가 강하게 드는 것이라던데 나는 개월을 넘어 3.6년 차에도 왔었다.) 그래도 그때마다 쑥(아랍 전통시장)에 가서 아랍 음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면 나아졌고, 카타르의 이국적인 모습 하나, 맛있는 음식 하나에 다 잊고 지냈다.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아직도 카타르가 좋다. 진짜 좋다.

중동 특유의 신비한 분위기도 좋고, 야자나무 좋고, 전통시장도 좋고, 아랍 음식도 너무 좋다.

베이지색으로 가득한 건물들도, 카타르의 황금빛 조명도 좋다.


물론 일하고 살면서 불편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이런 부분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살든 간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에 산다고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항상 행복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게다가 승무원을 일을 시작하면서 여러 나라를 다니게 되니 지루해질 틈이 없는 듯하다.

요즘은 진급 후 마주한 프리미엄 클래스라는 기내 안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느라 더욱 정신이 없고 말이다.


승무원의 시간은 비행기 속도로 간다던데,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면 얼마큼의 시간이 지난 후 일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몸도 마음도 건강히 그리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다가 회사와 웃으며 안녕할 수 있기를.




퇴사 생각 중이냐고?

아니다.


이건 그냥, 사직서 제출 후 마지막 달 비행을 하는 동료와 퇴사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나서 끄적거리는 이야기이다.


퇴사보다 내일 있을 비행을 더 생각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매달 로스터를 기다리는 나의 퇴사는 아직 먼 듯하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 정신이 없지만, 이 바쁨도 감사할 정도로 아직은 몸도 마음도 건강히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카타르의 모든 것이 싫어지면, 나도 떠날 준비를 해야지. 근데... 그런 날이 오려나?


몇 년 전 찍은 코니쉬 사진. 갈 때마다 넋 놓고 보느라, 정작 사진은 몇 장 없다. 내가 사진을 못 찍었지만ㅠ 실제로 보면 정말 예쁘다.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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