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이 되고 나서도 가끔 그를 떠올린다. 나의 첫사랑.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민을 몰래 좋아했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한다는데, 나는 반대였다. 9년이 흐른 지금도 우민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민이 기억나다가도 다음날이면 잊어버렸는데, 며칠째 그를 생각하고 있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핸드폰 번호도 알 수 없어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 가로막혀 가슴이 답답했다.
‘얘는 인스타 같은 것도 안 하나’
SNS에 김우민의 이름을 검색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다. 남동생 구현은 왜 그렇게 한숨을 쉬느냐며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지 물었다. 염려 서린 눈빛이었다.
“걱정은 무슨…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그래.”
구현은 요즘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고, 너무 일만 하지 말고 당일치기라도 바람을 쐬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일과 사람에 치여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지 오래였다. 월차를 쓰고 싶었지만 밀린 업무가 많다. 월차를 쓰면 그날 할 일을 팀원 중 한 사람이 대신해야 한다. 집안 경조사라면 모를까 여행 간다고 월차를 낼 수는 없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병가를 쓸까 하다가 생각을 거두었다. 마음에 걸릴 일은 애초부터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이번 주는 토요일까지 회사에 보고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다.
‘다음 주 주말에 가면 되지 뭐.’
회사-집-회사-집을 반복하다 보니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났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밀린 잠을 푹 자고 느긋하게 일어나 보니 오후 1시가 돼가고 있었다. 옆으로 매는 큼직한 쇼퍼백에 잠옷, 로션, 속옷을 챙기고 샤워를 했다. 핸드폰에 ‘바람 쐬기 좋은 곳’을 검색했다. 주로 바닷가였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 가기로 했다. 넓고 깊은 바다를 보면 썰물처럼 우민이 머릿속에서 쓸려나갈지도 몰랐다. 차로 두 시간 반이면 현지 해변에 갈 수 있을 터였다.
유월의 바다는 유난히 반짝였다. 햇살이 닿아 윤슬이 일어 빛나는 보석 같았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다가 해변 끝자락에 닿았다. ‘별처럼 빛나는’ 간판이 보였다. 호기심에 유리창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 손짓했다.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자 딸랑딸랑 종소리가 났다. 아담한 내부는 사방이 책이었다. 매대에 놓인 책부터 천천히 살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등을 바라보며 어느 책을 집어 들지 고민하고 있는데 종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그가 눈이 마주쳤다. 마스크를 썼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얼어붙은 듯 발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 그도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책방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작가님 책이 그새 다 팔렸어요. 세 권 입고해야겠어요.”
그제야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아…. 요즘 일이 많았어요. 차에 몇 권 있는데 가져다 드릴게요.”
작가님이라는 그녀의 말이 맴돌았지만, 지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책을 가지러 가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우민에게 말했다.
“김우민 맞지.”
책방 주인은 드립 커피를 내리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
우민은 표정 없이 중학교 동창이라고 대답했다.
“어머? 세상에나. 세상 참 좁다더니.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니까.”
책방 주인은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책방에서 우민을 만난 건 우연이지만, 그녀 말대로 언제 어떻게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되는 게 인연이라는 거구나. 난 오늘부터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책 가지러 갈 건데, 같이 가자. 가면서 이야기해.”
우리는 책방을 나섰다. 우민의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면서 이야기하자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우민이 신경 쓰였다.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했으니 어떤 말이든 먼저 꺼내 주면 좋을 텐데.’
우민은 날 다시 만난 게 반갑지 않은지, 나는 그에게 그저 중학교 동창 중 하나일 뿐이구나 싶어 실망스러웠다. 우민은 트렁크에서 네 권의 책을 꺼냈다.
“왜 네 권이야? 세 권 필요한 거 아닌가….”
여전히 우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만년필을 꺼내 책에 적었다. 작가니까 싸인을 하는구나. 생각하며 그가 싸인을 마칠 때까지 바다를 보며 기다렸다. 우민이 책 한 권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내가 쓴 책이야.”
내가 책을 받아 들자 우민은 이제 됐다는 듯 가자고 했다. 속상해진 나는 그에게 밑도 끝도 없이 성난 목소리로 고백해 버렸다.
“중학교 때 너 좋아했어. 가끔 널 생각했고. 지금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서.”
우민이 환하게 웃었다. 의외였다.
‘웃음의 의미는 뭘까.’
우민은 책을 펼쳐 보라고 했다. 겉표지에는 ‘시절 인연 – 김우민 소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뾰로통해진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집에 가서 읽겠다고 했다. 우민이 내 손에 들린 책을 가져가더니 겉장을 펼쳐 들었다. 거기에는 핸드폰 번호와 함께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첫사랑에게 이 책을 전합니다.
김우민 드림.
우민은 다시 내게 책을 건네며 말했다.
“여기에 나의 세계가 있어. 너의 세계도.”
달뜬 얼굴이 되어버린 나는 책의 겉표지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답답함은 사라지고, 가슴 위로 햇살이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윤슬이 잔잔하게 떠오르고 있다. 너라는 물결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