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

글쓰기의 기쁨과 즐거움

by 이수아

나를 낳아주지 않았지만, 어머니라고 부르는 분이 있다. 경기도 양평에서 펜션을 십수 년째 펜션을 운영하고 계신 사장님이다. 펜션 사장님의 번호는 나의 핸드폰에 ‘비아지오 어머니’라고 저장되어 있다. 나는 이분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가슴으로 낳아준 나의 어머니.


‘비아지오’(Viaggio)는 이탈리아어로 '여행'이라는 뜻이다.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 연인과 아름다운 여유를 느끼고 싶은 분들, 친구와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분들, 그리고 혼자만의 조용한 휴식을 갖고 싶은 분들. 그러한 모든 분을 위한 힐링의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펜션 이름에 담겨 있다.


비아지오 어머니와 인연이 된 건, 9년 전 어느 날이었다. 동탄에 살던 시절, 늘 친정을 그리워하는 나에게 동네 엄마 K가 비아지오를 소개해 주었다. 세 살 된 첫째와 갓 백일을 넘긴 둘째를 데리고 비아지오에 처음 방문했던 날이었다. 초면에도 비아지오 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시며 “나는 아기들이랑 아기 엄마를 좋아해요. 어서 와요.”하고 말씀하셨다. 펜션 사장님께서 손님을 맞이하시는 게 능숙해서 얼떨떨하다가, 그 다정함과 따스함에 마음에 채워진 경계심이라는 자물쇠가 스르륵 풀려버렸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5년 전, 우리 가족은 동탄에서 용인시 처인구 어느 작은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그시기즈음, 비아지오 어머니와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어느 지역 건축 업자분이 비아지오 어머니가 손님들 마음을 꾀어내는 상술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셨다,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하하하. 그래요?”하고 웃어넘겼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미 4년간 수십 번을 펜션에 드나들면서 비아지오 어머니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비아지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터를 잡은 후 친정어머니보다 먼저 새집으로 와주셨다. 내 키만 한 멋진 아레카야자를 차에 싣고서 방문하셨다. 10년 넘게 아파트에 살다 보니 주택이 낯설어 한동안 잠을 설치며 지낸 나날이기도 했다. 비아지오 어머니가 오신 날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그제야 ‘내가 정착할 곳이 이곳이구나.’ 싶었다.


비아지오 어머니는 내가 혼자 펜션에 가거나 아이만 데리고 가면 종종 밖으로 나가자고 하신다. 아이 키우느라 밥도 제때 먹지 못하고, 남는 음식 아까워서 대충 때우는 주부의 사정을 잘 알고 계셔서, 분위기 좋은 카페나 맛있는 식당에 가자고 채비하신다.



아이가 아가일 때 육아가 몹시 힘겨워 고통스러운 날에도 온기 한줌을 선물해 주신것도 비아지오 어머니였다. 그래서 훌쩍 어디론가 가고 싶을때면 망설임없이 옷 한 벌 챙겨서 비아지오로 향하곤 했다. 단 한 번도 힘들어서 왔다고 말해 본 적 없지만, 비아지오 어머니는 내 마음을 잘 헤아려주셨다. 아이의 먹거리를 나보다 먼저 생각해 찬거리를 방에 놓고 가시는가 하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시는 것으로 육아를 잠시 잊게 해주셨다. 그 짧은 자유시간은 힘겨운 육아를 몇 달간 버티게 해주었다.


비아지오 어머니의 친손주가 대학생이다. 나에게 어머니라고 하기엔 비교적 나이가 많으셔서, 오늘처럼 비아지오에 다녀가는 날이면 코끝이 찡해진다. 삼사 개월에 한 번씩 비아지오에 방문하는데도 갈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펜션과 9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건 비단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비아지오에서 보낸 수많은 밤이 익숙함에서만 감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움을 선물해 주었다. 사계절이 다르듯 비아지오의 정원은 매해 년 같은 계절에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나와 아이 그리고 나와 비아지오 어머니가 나누는 이야기는 날로 깊어진다. 흐르는 세월과 같이 내. 외관의 모습도 어딘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비아지오에 가면 늘 하는 일이 있다. 모두 잠든 밤 카페테리아에서 새벽녘까지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집에서도 아이가 잠든 밤에 주로 독서와 글쓰기를 하지만, 비아지오의 카페테리아에서는 집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를 만난다.


그것은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덕분이다. 컴퓨터 책상만 해도 정리하지 않은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거나 먹고 남은 음료가 담긴 컵이 그대로여서 글을 쓰다가 중단하고 정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로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질때가 잦다. 비아지오 카페테리아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은 불안감도 물리쳐준다. 나만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 수 있게 한다.


이럴 때면 쓰는 사람에게 작업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곤 한다. 작가들이 작업 공간으로 카페에 가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콘센트가 준비되어있는 카페가 많다. 음료 한 잔 값을 지불하면 장시간 앉아 있을 수도 있다. 은은한 커피 향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카페는 좋은 작업 공간이다. 아이 일정에 맞추어진 삶이다 보니 대부분 집에서 글을 쓰지만 작업하기 좋은 카페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향하는 나를 상상한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꼭 이곳에 와야지, 하고 카페 상호명을 사진으로 찍어둔다.


언젠가 모든 게 역사로만 존재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날이 도래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비아지오처럼 좋아하는 곳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지어나가고, 그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며 나의 세계 깊은 곳까지 유영하고 싶은 마음이다.


누군가의 역사는 이렇듯 오랜 세월 속에 맺어지는 장소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9년간의 나의 역사가 되어준 비아지오, 훗날 나의 서사가 될 비아지오를 아끼며 기록할 수 있는 지금을 맞이할 수 있는 건 글쓰기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글쓰기가 주는 최고의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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