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덜어내기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누군가와 함께 썼다. 그 시작은 글쓰기 모임이었다. 독서 리뷰, 장소 리뷰, 시, 에세이를 써서 두 권의 문집을 만들었다. 누군가 쓴 글을 한 권으로 엮을 때 글쓰기 모임의 리더는 우리의 수준 차이를 염려했다. 무언가라도 꾸준히 써온 사람과 나처럼 책을 읽다가 어느 날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의 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글쓰기 모임 일원이 쓴 글과 내 글의 수준차를 줄이기 위해 글을 거듭 수정하며 부단히도 애썼다. 모임을 나오고 나서 잘 쓰고 싶은 마음으로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 뒤로 글쓰기 모임을 비롯해 수업을 이어온 지 삼 년이 지났다. 에세이, 소설, 시, 그림책, 동화 등 다양한 수업을 받아왔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어느 장르 하나 만만한 게 없다는 것이었고, 내가 잘 쓸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였다.
글이란 누군가로부터 배워지는 것인가, 하는 물음표를 만나게 되면서 심각하게 고민하던 날이 있었다. 글쓰기는 누군가로부터 배워지는 게 아니었다. 가르치는 분에 따라 여러 작법을 배웠지만 글쓰기에는 어떠한 틀이나 작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에세이로 예를 들자면 가르치는 분은, 어떻게 하면 말이나 이야기가 되는지, 어떻게 쓰인 문장이 독자의 마음에 가닿고 울림을 줄 수 있는지, 글이 논리적이지 않아 혼란을 초래하진 않는지,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글인지, 조금 더 재밌고 생동감 있는 글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등 다양한 고민과 의견이 들어 있었다.
글쓰기 수업에서 배우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되고 풀리지 않는 실마리가 조금은 빠르게 풀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걸 꼭 배워야지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혼자 묵묵히 계속 쓰면서 충분히 터득해 나갈 수 있다다.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공부 잘하는 친구는 꼭 교과서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답도 교과서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글쓰기에 교과서는 책이이다. 글쓰기의 모든 궁금증의 답은 책 속에 있다. 원하는 답을 찾아내는 일이 관건이다. 그러니 책 편식 없이 다독해야 한다. 미친듯이 읽고 수집한 문장을 정리하길 권한다. 언젠가 글쓰기와 연관지어야 하니까.
글을 쓰다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고민을 만나게 되면 막막해진다. 나는 대부분의 답을 책에서 찾았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분석하고 구조와 전체적인 틀을 이해하면서 답을 찾아 나갔다. 글쓰기 실력이 쌓인 건 혼자 숱하게 써온 나날이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렇게 저렇게 써보고 지독한 퇴고를 거치면서 실력이 점차 늘어갔다.
가장 실력이 빠르게 늘 때는 기계가 된 듯 무언가를 끊임없이 쏟아냈을 때와 지독한 퇴고를 거치며 글을 도정할 때였다. 퇴고는 글을 수정하는 과정이다. 퇴고에도 실력이라는 게 존재한다. 퇴고 실력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도정하면 글이 안 좋아진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아갔다. 글쓰기 책이나 강연에서 자주 보고 듣는 게 쓰는 근력이었다. 글쓰기에도 근력이라는 게 있고, 근력이 붙어야지만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쓰는 근력은 다작을 하면서 조금씩 붙게 된다. 근력을 탄탄히 기를 때 나는 두 가지에 집중했다. 다작과 지독한 퇴고. 하루 중 최대치로 글을 썼을 때는 에세이 열 편이었다.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를 때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글을 대여섯 편씩 썼다. 엽편 소설, 에세이, 각종 리뷰, 독후감 등등이었다.
어떤 걸 써야 할지 구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 그럴 땐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쓰고 싶은 걸 무작위로 써냈다. 잘 쓰고 싶은 마음과 맥락은 생각하지 않고 쓰고 싶은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 마구잡이로 썼다.
하나의 키워드를 잡아 쓰기도 했었다. 여러 단어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쓰기도 했고 에피소드가 없으면 찰나에 떠오르는 생각을 썼다. 생각마저도 나지 않을 땐 인터넷에 그 단어를 검색했다. 단어에 해당하는 정보를 보고 나면 한두 줄이라도 무언가를 쓸 수 있었다.
영화, 드라마, 그림을 보고 글을 몇 번 써보기도 했는데, 내가 쓴 글은 주로 토해내고 싶은 감정 덩어리였다. 설레던 순간, 벅차오르던 순간, 슬픔이 차오르던 순간, 짜증이 밀려오던 순간, 같은 감정이 내 안에 고이면 그것을 글로 끄집어내었다. 좋을 땐 힘들었던 기억을 쓰고 힘들 땐 좋았던 기억을 쓰기도 했다.
너무 좋아서 방방 뜨거나 너무 좋지 않아서 물에 젖은 듯 축 가라앉아 있는 게 싫은 이유에서였다. 내가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는 상태는 평안할 때이다. 들쭉날쭉한 감정을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밖으로 내어놓고 감정의 균형을 잡으려 한 것이었다. 여전히 감정이 널뛰기하면 쓰고 싶은 갈증에 목마르다. 지금도 균형을 잡기 위해 글의 운명과 상관없이 마음을 백지 위에 쏟아내는 것으로 흘려보내곤 한다.
언제인가부터 혼자서도 충분히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글쓰기 모임과 수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이유는 누군가와 함께 쓰면서 얻는게 있어서이다. 글은 혼자 쓰지만 누군가와 공유하면 혼자 쓴다는 기분과 외로움이 덜어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쓴 글을 온라인에 올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로부터 공감과 이해 받고 싶은 마음이 거기에 머무른다.
코로나 창궐 이후 글쓰기 수업과 모임은 비대면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2021년 한 해는 사회 불안증으로 생존에 필요한 마트, 병원, 아이의 학교와 학원 이외에는 집에서만 지냈다. 집 근처 시립도서관만은 제외였다. 몸과 마음이 온전하지 못할 때도 도서관을 꾸준히 다닌 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장소가 도서관이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 시기만큼 독서와 글쓰기가 생명줄처럼 느껴지던 적은 없었다.
사회, 타인과 단절된 채 집에서만 지내는 동안에도 비대면으로 글쓰기 수업을 듣고 모임을 이어왔다. ZOOM으로 수업을 듣고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쓴 글을 매일 공유하며 모임에 참여했다. ZOOM으로 수업을 하다 두 번 오프라인 수업을 나가기도 했는데, 불안을 안고 집 밖을 나서며 두려움을 견뎠다. 그 두 번의 경험은 올해 1월의 어느 날, 이제는 집에서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되어주었다. 세상으로 향할 때 용기가 되어준 큰 힘이었다.
삼 년간 천 편이 넘는 에세이를 썼다. 지치지 않고 쓸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글 벗들 덕분이다. 글 쓰는 게 얼마나 고독한 작업이고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일인지 모른다. 외로움에 약할수록, 고독의 시간을 견디지 못할수록, 글이 써지지 않아 고통스러울수록, 글쓰기를 하며 궁금증이 들수록, 누군가와 함께 써야 한다. 나처럼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데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글쓰기 모임이나 수업은 되움이 된다.
다른 취미 모임이 많지만 그중 글쓰기 모임과 수업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삶이 담긴 내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고백한 글을 읽는 건 한 사람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과 같아서이다. 서로의 세계를 수용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위로하는 건 함께 쓰고 공유할 때 이루어진다.
나의 아픈 이야기가 담긴 글을 수업에서 낭독할 때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아품이 보듬어진다. 그럼 나도 누군가의 아픈 곳을 보듬어주고 좋은 일에 기꺼이 기뻐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 서로의 글을 읽고 이해할 때, 아픔은 덜어지고 기쁨은 배가 된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백일 글쓰기와 글쓰기 수업을 이끌며 수강생 분들과 함께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