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겨울, 다시 봄
늘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친구가 많길 바랐다. 바람은 집착이 되었다. 그 집착은 학창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비롯된 듯하다. 요즘 말로는 아싸 라고 한다. 어촌 마을에 살았던 나에게는 나도 모르는 냄새가 배어있었다. 갯벌의 짠내가 그것이었다.
초등 6학년 때 내 존재는 관계의 바운더리 바깥이었다. 은근히 따돌림을 받다가 왕따가 되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 살았던 승희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나에게서 나는 냄새를 몹시나 싫어했다. 승희의 어머니는 미용실을 운영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승희의 헤어스타일은 예쁘고 깔끔했다. 옷도 잘 입는 친구였다.
내 사계절 옷을 다 합쳐도 열 벌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계절마다 두세 벌의 옷을 입고 다녔다. 한 벌을 일주일 내내 입기도 했었다. 승희는 반에서 인기가 많아서 잘 어울려 노는 친구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승희의 놀림이 심해지면서 반 아이들은 나와 어울리지 않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민하던 날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들이 나와 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께 친구 관계로 쌓인 고민을 말씀드려도 소용없었다. 나이가 지긋하셨던 선생님은 학년 주임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친구와의 고민보다 성적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내가 교우 관계로 고민을 꺼내면 듣기 싫다거나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하셨다. 외롭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친구를 사귀는 게 부담스러웠다.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어도 ‘날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함께 먹자고 하는 친구와만 어울렸다. 다음날 그다음 날이 되어도 어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도시락을 같이 먹었던 친구에게 먼저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누군가 먼저 무언갈 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으면 혼자 지냈다. 하교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다 집에 가는 것도 여러 날이었다. 경민이, 아름이, 선자, 춘이라는 친구는 이런 나에게 자주 손을 내밀어주었다. 덕분에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덜 외롭게 지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사귄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이 친구들 저 친구들이 어울리는 무리에 끼어 지내긴 했지만 이것도 어쩌다 몇 번이었다.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많은 친구 중 단 한 명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을 가서는 몇 명의 친구를 사귀었지만 자퇴 후 다시 재입학하는 바람에 간간이 연락하고 지내는 게 전부였다. 그때 사귀었던 친구 3명은 고맙게도 날 잊지 않아서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SNS로만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 게 다이지만 그래도 1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다.
과를 바꿔 대학을 재입학하고 나서 낮에는 교내 부속유치원에서 부담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부담임이라는 말은 그럴싸했다. 그 당시에는 보조교사를 부담임이라고 불렀다. 내가 한 일은 담임 선생님을 돕는 것이었다. 밤에는 야간반 수업을 들었다. 그러느라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지만 기숙사 생활을 한 덕분에 같이 방을 쓰는 친구 몇 명을 사귈 수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폭넓은 친구 관계를 갖고 싶다는 욕구는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자퇴 후 재입학한 처지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친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아주 많은 친구를 알고 지내고 싶었던 욕구가 고개를 든 건 아이를 낳은 후부터였다.
내 아이에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부지런히 동네 엄마들을 사귀었다. 가정주부가 되면 아이 친구의 엄마가 내 친구가 되기도 한다. 친구에 대한 아니 어쩌면 사람에 관한 집요함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길처럼 번져갔다. 더 많은 동네 엄마를 알고 싶었고 긴밀한 관계를 원했다. 내 곁을 떠나면 어쩌나, 라는 불안을 안고 무조건 잘해주었다. 가능하면 비위를 다 맞춰 주려고 애썼다. 내 자아가 스스로에게 잊히는지도 모른 채 상대방에게 집중하던 날들이었다. 집착이었다.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잘해도 아이들이 놀다가 투닥거리는 일이 생기면 상대 아이의 엄마는 나에게 한동안 거리를 두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던 어느 날, 사회에서 만난 사이에는 친구가 되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군다나 나와 상대방 사이에 아이처럼 다른 누군가가 끼어 있는 사이에는 친구가 되기가 몹시 어렵다. 11년째 육아를 하는 동안 만나온 동네 엄마가 셀 수 없이 많다. 지금은 단 한 명 K만이 내 곁에 남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울리지 않아도 친구가 되었다. 나머지 인연은 바람처럼 스쳐 갔다.
5년 전 신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했다. 나와 친구가 된 K와는 이사 후에도 두세 달에 한 번꼴로 만남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도 동네 엄마들이 있지만 도시 엄마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아이가 원하는 친구와 어울리게 한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고 나면 마음 맞는 엄마들끼리 차 한잔을 마신다거나 밥 한 끼를 함께 먹기는 해도 어떠한 목적을 갖는 모임은 없다. 반 모임 같은 게 그러한 것인데 학기 초에 형식적으로 하는 한 번이 전부다. 이마저도 코로나 창궐 이후 사라졌다. 지금의 나는 이러한 관계의 자유로움에 만족한다.
은따와 왕따 같은 한 번의 아픈 경험은 질기게 날 따라다녔다. 훗날 나의 친구 관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승희는 어딘가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외모를 놀리는 친구들이 있다. 반면 같은 또래여도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속 깊은 친구도 있었다.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에게 어떠한 걸 가르쳐 주고 대물림 해주어야 피와 살이 될지 어린 나의 한 시절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에게 배우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을 보는 시각을 키우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겉으로 보이는 것에 관한 부질없음을 감각하게 된다. 네일아트, 속눈썹 펌을 즐겨하고 있지만 나를 위해 하는 일이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은 아니다. 살이 쪄서 뚱뚱해지고 잘 가꾸지 못해 머리가 산발이 되어도 나는 변함없는 나로 존재함을 안다. 겉모습이 보기 좋게 변하면 자신감을 더 가질 수 있고 자존감도 올라간다. 그렇다고 해도 본래의 한 사람이 가진 성질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 인연의 닿고 흘러감만이 달라질 뿐.
그간 만나온 인연을 떠올려 보면 참 많은 수이다. 평생 함께할 것만 같았던 인연도 세월에 묻혀 흘러갔다. ‘평생’, ‘인연’ 두 개의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가족도 울타리가 무너지면 그만이다. 관계를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흘러가는 인연을 붙잡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 돈, 시간, 에너지를 쓰는 게 헛된 일이라고 여기던 날도 있었다. 인연의 소중함을 모른 채 지내던 날도 있었다. 그날들을 지나오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절절히 알게 되었다. 각자도생. 개인주의.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의 유. 무를 떠나 시간과 마음을 나누고 추억을 쌓아가는 어려워지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언젠가 나에게서 멀어질지도 모를 인연이라고 해도 지금의 관계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함께 한 날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추억이 되어 기억 속에 고스란히 저장된다. 그 속에 한 시절의 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