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타리 꽃처럼

by 최원돈

마타리 꽃처럼

최원돈


붉은 여명이 하늘을 가득 물들인다. 하이원 힐 리조트에서 맞이한 새벽은 마치 저녁노을처럼 붉고 장엄하다. 해가 뜨기 전의 고요한 시간, 700 고지 고한읍, 사북마을 언덕 위에 선 리조트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낮게 깔린 구름마저 붉게 물들인다.


아침 식탁에는 며느리가 정성껏 차린 음식이 올랐다. 샐러드와 호박부침, 치즈를 얹은 따뜻한 빵. 아내와 밤새 이야기를 꽃피우느라 늦게 잤을 텐데,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 마음이 고맙다.


오늘은 아들 내외는 손녀 소은이를 데리고 워터월드로 간단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며 서둘러 나선다.

우리는 마운틴 리조트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운탄고도의 정상으로 향한다. 케이블카 아래로는 들꽃 무리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고, 저 멀리 태백의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정상은 사방이 탁 트여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정상에 있는 포토존에서 태백 능선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꽃틀, 나무틀, 하트 프레임 등 여러 소품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다. 목이 말라 칡즙 한 통을 사서 천천히 마신다.


운탄고도 둘레길은 노란 마타리꽃으로 수놓아져 있다. 가는 줄기 끝에 매달린 좁쌀만 한 부채꼴 꽃송이들. 흔들리는 듯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그 자태는 한 송이 미인처럼 느껴진다. 꽃말이 ‘미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다. 연약해 보이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 단아한 아름다움이다.


하늘길을 걷던 명상가 네 분 스님의 핸드 프린팅 아래에는 도종환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참선처럼 읽게 되는 시. 무엇을 버려야 나도 아름답게 탈 수 있을까.


백운산 마천봉 아래에는 작은 돌탑이 쌓여 있다. 그 돌탑 앞에서 큰딸이 조용히 두 손 모은다. 무슨 소망을 빌었을까. 아내는 웃으며 말한다. “둘째 대학 합격을 빌었겠지.”


원통형 건물 꼭대기 ‘구름카페’에서 도롱이 커피를 주문해 자리에 앉는다. 이 카페는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며 창밖의 풍경을 보여준다. 1,400미터 백두대간의 능선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말없이 바라보는 산줄기. 말없이 전해지는 위로.


그 순간 나옹선사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그렇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문득 아내의 얼굴을 바라본다.

언젠가보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마타리꽃 한 송이를 본다. 말없이, 연약한 듯 견고하게 피어 있는 꽃.


“내가 치매에 걸리게 되면 모두 당신 탓이에요.”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나는 말없이 웃는다. 그 말속엔 두려움도, 유머도, 깊은 사랑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 물같이 바람같이 산다는 건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오늘, 이 산처럼 말없이. 이 바람처럼 맑게.

마타리 꽃처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