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 빛의 여전사가 깃든 밤
최원돈
서울의 하늘은 더 이상 예전의 하늘이 아니다. 한강 바람이 스치는 뚝섬의 밤하늘 천이백 대의 드론이 수놓은 빛의 무늬가 서서히 형상을 이루더니, 마침내 한 여전사의 모습으로 피어난다. 애니메이션 속 인물 ‘루미’가 현실의 밤하늘에 되살아난 것이다. 순간 강물은 별빛을 거울삼아 출렁이고, 사람들의 눈빛마저 반짝인다.
세계가 먼저 뒤집혔다. 이제 한국이 뒤늦게 뒤집히고 있다. 넷플릭스 K팝 판타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그 중심에 있다. 공개 석 달 만에 3억 3천만 뷰의 주제곡 골든은 미국과 영국의 차트를 동시에 정복했다. 수많은 사람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발끝이 리듬을 좇는다.
사람들은 어느새 라면과 김밥을 찾고 도깨비와 호랑이가 등장하는 한국의 옛 설화에 눈을 반짝인다.
줄거리는 낯설지 않다. 화려한 무대 위의 걸그룹인 그들의 본업은 수백 년 이어진 퇴마 사냥꾼이자 빛과 어둠의 대결은 영웅의 희생과 깨달음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케데헌이 특별한 것은 이 오래된 서사가 한국이라는 토양 위에서 다시 자라났다는 점이다.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가 화면을 뛰쳐나오고 도깨비와 저승사자가 무대에 선다. 전통 무구와 칼날이 눈부신 액션을 빚어내고, 단청과 일월오봉도는 화면을 장엄하게 물들인다. 남산타워와 명동의 불빛, 그리고 지하철의 분홍색 임산부석과 초록 때수건과 국밥 위에 얹은 종이 냅킨 하나까지 한국의 일상이 작품 속에서 생생히 호흡한다. 그 디테일마다 오래된 삶의 결이 묻어나고,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케데헌을 “시대정신을 사로잡은 작품”이라 평했다. 기후변화와 저성장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은 젊은 세대가 가장 절실히 묻는 물음 “나는 누구인가.” 케데헌은 그 물음을 여전사들의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 가면과 진짜 얼굴 사이에서 흔들리는 청춘의 초상이 전 세계의 거울 앞에 비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스크린에 머무르지 않는다. 노래는 현실의 무대에서 불리고, 박물관에서는 전통의 유물이 되살아난다. 서울의 거리와 시장은 새로운 순례지가 되고 사람들은 값싼 음식 앞에서 세계와 나란히 앉아 한국의 맛을 나눈다. 가상과 현실이 서로를 비추며 겹쳐질 때 서울은 더 이상 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삶의 이야기 공간이 된다.
이날 밤 루미의 형상이 흩어지고 어둠이 다시 강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불빛이 남았다. 서울의 하늘은 예전의 하늘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의 오랜 무의식과 오늘의 삶이 한 몸이 되어, 세계와 함께 새롭게 노래하는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