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최원돈

-최원현 수필집 『얼마나 그리웠으면』을 읽고

최원돈


오늘 날씨는 참으로 요상하다.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그치기를 반복한다.

아침에 밭에 나가 김장밭을 둘러본다. 배추와 무와 쪽파를 심은지 두 주가 되었다. 지난주에 ‘크루즈 여행’으로 집을 비웠더니 그새 부쩍 자랐다. 궂은 날씨지만 배추밭에는 포기마다 복합비료를 넣고 무밭에는 그냥 뿌린다. 뾰족이 나온 쪽파 고랑에는 유박을 뿌려 준다.

금세 또 하늘에서 비를 뿌린다. 하늘을 보니 그칠 비가 아니다. 숯가마 가방을 챙겨 아내와 함께 치악산 참숯가마로 간다. 고속도로에서도 두어 번 비를 만났다.


아내는 오늘 방금 꺼내는 '숯불 가마' 앞에서 숯불을 쬐고 나는 '꽃탕 가마'를 들락거리며 책을 읽는다. 최원현 선생의 스물네 번째 수필집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다. 책 표지 그림이 앙증스럽다. 붉은 능소화 담벼락 위로 얼룩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능소화를 쳐다보며 살금살금 다가가는 모습이 그리움을 찾아가는 듯하다.


선생은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그리움'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다가갈 수 없는 사람,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문장 하나하나에 담으며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문학"이라고 했다.

그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 골목 어귀의 나무 한 그루, 내 서재의 창으로 들어오던 저녁노을 한 줌이' 글감이라고 한다.

수필은 결국 내 삶의 껍질을 벗기는 문학이다. 꾸미지 않고,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 보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수필은 진실한 문학 장르라 말한다.

"삶을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내려앉는 날들도 있습니다. 문득 누군가가 보고 싶고, 어떤 시간이 그리워지고, 잊은 줄 알았던 마음 한 가닥이 되살아나는 날들 말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속에 쌓여 있던 그리움의 조각들을 모은 글입니다."


이번 수필집은 최근 5년 동안 선생이 원고 청탁을 받아 쓴 수필이다. 선생은 평소에 그 바쁜 일정 속에서도 원고 청탁을 한 번도 그른 적이 없다고 했다. 때로는 원고 마감일 자정에 마무리해 보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럴 때의 희열과 보람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한다.


갑자기 숯가마 지붕에서 무슨 콩 볶는 소리가 들리더니 앞마당에 작달비가 쏟아진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더니 마당을 흥건히 적시면서 도랑물이 된다. 양철지붕 아래에서 빗소리는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 거세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수건을 둘러쓰고 꽃탕 가마 안으로 들어간다. 숯가마 안은 조용하고 아늑하다. 이 세상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후끈 달은 벽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 적외선이 온몸을 이완시키며 흠뻑 땀에 젖는다. 이곳이 나의 퀘렌시아인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글을 읽고 있는가.


바깥으로 나오니 금방 하늘이 맑아져 한 줄기 햇살이 비쳐온다. 다시 읽던 책을 펼쳐 든다.


「그리움, 그리움 • 그리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시집 두 권을 받고 쓴 글이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시인의 글에 가슴이 먹먹해져 쓴 그리움이다.

"나는 분명 그리움으로 아니 그리움 때문에 살았던 것이 맞다. 그러면 앞으로는 또 무엇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도 또한 '그리움•그리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거의 그리움, 현재의 그리움• 미래의 그리움으로 사는 게 사람일 거란다.

어느 시인은 사람 이니까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도요새도, 때로는 하느님도 아프다는 시가 떠오른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사랑으로 산다고 하였던가. 최원현은 그리움으로 산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또 비가 내린다. 숯가마 양철지붕 위를 세차게 두드린다. 숯가마에 들어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고 그리움이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란다. 어찌 보면 사랑이 그리움이고 그리움이 곧 사랑 아닌가. 톨스토이의 사랑이나 최원현의 그리움이나 모두 애틋하게 보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이다.


"누군가 이런 내게 당신이 사랑하는 생활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 순간이라 말함도 틀리거나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이 나이에 글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어울려 읽고 쓰고 가르치며 시간 즐기고 그걸 한답시고 출근하듯 시간 맞춰 나가고 그러다 보니 선생이라고 대접도 받는 지금 내 생활이야말로 내 삶의 황금보다 귀한 시간 '지금'이 아니고 무언가." -「내가 사랑하는 생활」


「내게 쓰는 유언장」

"나는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남은 것이 자식이 아닌 누군가에게도 나눠줬으면 싶네. 아들과 딸에게 50% 그리고 나와 아내의 생존 비용 25%를 쓴다고 하고 사랑의 빚 갚기로 남은 25%라도 실천하고 싶네"

평생을 살아오면서 진 ‘사랑의 빚’을 갚고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선생의 의지에 숙연해진다. 또한 소중하게 간직해 온 선생의 손때 묻은 책 중 보존적 가치가 있고 문학적 가치도 있는 책은 그걸 필요로 하는 후학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시신 기증도 하고 남은 육신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아내와 자신 중 운신이 어렵게 되면 요양 병원에 가겠단다. 마지막으로 함께 살아온 아내와 자식 손주에게도 인사를 하고, 문단과 교회의 친구에게도 인사를 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평생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지만 그래도 만년에 이만큼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당신 힘이요. 그런데도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해준 것 같아 미안하기 그지없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걸 말로 바꾸지는 못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잘 모르겠소. 늘 퉁퉁거리기만 해서 미안하오. 한평생 나와 같이해 준 것은 내겐 가장 큰 축복이요. 사랑하오."

선생의 수필에서 아내에 대한 유일한 사랑 고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대충이라도 인사를 했으니 자네와도 인사를 해야겠지? 고맙네. 인간 최원현으로 살아올 수 있게 해 준 거, 그리고 그 어렵고 힘든 삶의 날들을 용케도 참고 이겨내며 여기까지 왔으니 자네야말로 위대한 승리자가 아니겠나. 내가 나를 칭찬하는 건 우습지만 그래도 나를 위한 박수도 치고 싶고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네. 고맙네 고마웠네. 사랑하네. 이렇게 자네와도 이 세상에선 이별이네."


이 유언장을 읽으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실천하고 싶다는 의지가 배어 있다. 사실 후학의 측면에서 보면 최원현만 한 수필가도 없다. 전국 곳곳에 문학관이 수도 없이 많다. 선생은 평소에 그런 꿈과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디 본인의 의지만으로야 되겠는가. 생때같은 자식 손주들이 있고, 문단의 후학들이 '최원현 수필 문학관'을 세우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 최원현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평생 모은 귀중한 자료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은 한국수필 계로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소리에 대하여」

이번 수필집에서 가장 감동적인 글이다. 최원현 수필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그동안 최원현 수필집에 발표된 수필 중에는 최원현만이 쓸 수 있는 주옥같은 글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수필집에서는 그런 글을 찾기 어려웠다. 가슴 먹먹하게 울림을 주는 이 한 편의 수필을 읽고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겪은 일이다. 할머니의 "느그 이숙이 죽었다" 이 한마디를 듣고 달려가 실성해 있는 이모를 보고 옆에 누여있는 핏덩어리 아기를 본다.

"이모가 마치 유령처럼 앉아 있었다. "이모! 나왔어!" 했더니 겨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왔냐?"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반가움도 의아함도 없는 무표정으로 멍하니 다시 창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영혼이 떠난 사람 같았다. 방 한쪽 구석에서 아기가 울고 있었다. 울 힘도 없다는 듯 잦아드는 울음이었다. 다가가 아이를 안았다. 순간 아기가 아니라 불덩어리였다. 너무나 놀라 나도 모르게 아기를 안고 냅다 달렸다."

이모는 어머니의 정을 준 엄마와도 같은 분이다. 갑자기 이모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실성한 사람이 되어 유복자로 태어난 아기는 결국 이 세상 사람이 되지 못했다.

"버스에 올랐다. 자리 하나가 있어 이모를 앉히고 나는 아이를 안은 채 버스에 흔들리며 갔다. 얼마나 갔을까. 아기가 나를 보더니 시익 웃었다. 순간 내 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서는가 싶더니 식은땀이 온몸을 둘렀다. 무서움증이 확 몰려들었다. 순간 '이놈 가나 보네.' 하는 느낌이 오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기가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눈발이 날리는 동네 뒷산에 구덩이를 판 아저씨가 아기를 안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재촉했다.

"인자 되았다. 보지 말고 서서 획 던져부러라." 아저씨가 파놓은 작은 구덩이, 이 아이가 들어갈 자리란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꺼어 꺼억 나도 모르게 저 안 깊은 곳에서부터 시꺼먼 슬픔의 덩이가 목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뭣 헌다냐. 얼릉 이 구덩이에 던져부러라잉."

차마 던질 수는 없었다. 가만히 조심조심 아기를 구덩이 속으로 내려놓았다.

"또 벼락이 쳤다. "뭣 헌다냐? 너도 들어갈라고 그라냐? 획 던져부란께. 너까지 끌고 들어가면 어쩔라고 그러냐. 빨리 확 던져불고 나와부러라."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해서 내 딴엔 조심조심 최대한 바닥에 가깝게 해서 마지막 그의 방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내 손에서 놓아지는 그 순간 "터어ㅇ!" 소리에 가슴과 귀가 총 맞은 것처럼 멍멍해졌다. 아니 하늘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내 머리로 쿵 내려앉는 소리였다. 내 가슴이 아니 내 온몸도 터엉하고 울렸다. 하마터면 그 소리에 놀라 나도 구덩이 속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그 순간 내 몸이 뒤로 솟구쳐졌다. "뭣 허냐?" 마른 고함소리가 다시 내 귀를 때리면서 아저씨의 손이 나를 낚아챘는지 내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무리 애기라도 너 하나 끌고 가는 건 아무것도 아녀. 그렇게 너도 따라가고 싶냐?"


"그날 그 소리는 그가 내게서 정을 끊고 떠나는 소리였다. 그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러고 보면 처음 본 내게 내 가슴에서 시익 웃어 보이던 그 웃음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오빠 고마워, 그래도 오빠가 이렇게라도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여기까지 만이네. 잘 있어.' 그 어린것이 그렇게 나를 만나자마자 떠나면서 보낸 마음 씀이라고나 해야 할까."


"세월이 가면 잊혀지는 게 있고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다. 어머니 대신이었던 이모가 생각난 것은 아무래도 이모에 대한 그리움이 이모가 가신 달을 맞아 내 잠재의식 속에서 아이의 기억을 일으켜 냈나 보다. 내 눈으로 처음 목격했던 죽음 그리고 그를 직접 묻던 날의 기억이 초록이 푸르른 날에도 눈발 흩날리던 날의 기억으로 살아나는 것은 단순한 그리움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쯤 그 영혼은 어디서 우리를 보고 있을까. 그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는 있는 것일까. 터-ㅇ, 그 소리가 제대로 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새삼 오늘에."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어떤 영화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이다. 그래서 수필은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글이기에 더욱 감동적인 글이 되나보다.

나는 숯가마 마당으로 나와 정자에 앉아 치악산을 바라본다. 저만치 우뚝 솟은 산 정상엔 하얀 구름이 걸려있다. 시원한 하늬바람이 불어와 내 두 눈에 적신 눈물을 닦아준다. '나는 언제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수필에 입문하여 최원현의 『누름돌』을 읽고 2019년 한국수필 독서문학상을 받았다.

"최원현의 수필은 진실되고 아름답다. 그가 겪었던 인생의 경험을 그리움의 철학으로 승화시킨다. 그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응어리졌든 마음이 풀어지고 잃어버린 감성도 찾게 한다."

"나는 은퇴 후 여러 공부를 해보았지만 메마른 감성을 회복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글쓰기 공부는 달랐다. 마음을 열고 글을 써보면 더욱 깊은 사유와 진솔한 고백을 하게 되고 메말라 있던 감성도 회복되는 것 같다. 이것이 종심의 나이이지만 내가 수필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도 최원현처럼 그리움의 수필을 써보고 싶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사람이란 그리움의 존재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조차 하기 싫은 것까지도, 너무나 슬퍼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조차도, 너무 원망스럽고 창피스럽던 일까지도, 절망의 깊이가 너무 깊어 들여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때까지도 이상하게도 지나 놓고 나면 그마저도 그리워질 때가 있다. 잊고 싶을 만큼 싫은데도 더 잊어지지 않는 것도 과거의 나를 지배하는 것들이 그런 한갓 그리움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 '얼마나 그리웠으면'이라고 더듬거린다.

그리움은 결코 큰 소리로 내가 돌아보게 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달려와 나를 아느냐고 혹시 나를 기억하느냐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살그머니 아주 살포시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다가와 수줍게 그것도 슬픈 눈으로 말을 건다. 그래서 그리움이다. “


「영원한 동심 채봉丁埰捧 형을 그리며」

서로가 힘들었던 시절에 만나 인연을 맺었다.

"사실 형과 나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형도 나도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나는 아버지를 돌 달에 잃었지만 형도 아버지가 없다는 것, 둘 다 할머니한테 자랐다는 것이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무엇이 되었는지 형은 내게 늘 마음을 써줬지요."

그러든 정채봉이 그만 간암에 걸려 3년 동안의 투병 끝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동안 챙겨보지 못한 회한으로 쓴 글이다.

"형에 대한 글을 쓴 게 있어 법정 스님께 보내드렸더니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란 손바닥 책과 함께 "오늘 채봉선사 1주기도 되었고 해서 산소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사람 하나 떠난 자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하는 엽서를 보내와 형의 빈자리가 무소유의 스님에게도 얼마큼 큰 자리였는지를 새삼 생각게 했답니다. 오늘은 형이 할머니께 올리고 싶었다는 그 한 권의 책 『초승달과 밤배』를 형을 그리며 다시 펼칩니다.

최원현의 수필을 읽으면 정채봉의 글과 많이 닮아있다. 그리고 목성균의 글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서정적인 글을 쓴 수필가들이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쓰다가 막히면 이 세 사람의 수필을 읽는다. 목성균의 『누비처네』와 정채봉의 『오세암』과 최원현의『누름돌』을.


"추억이 되는 기억은 사람을 그리움으로 몰아간다. 청 벚꽃은 못 보더라도 비가 오는 날 개심사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채 피지 못한 벚꽃나무의 파란 향을 맡아보라. 뒤틀린 기둥과 낮은 지붕의 왜소한 문으로 흘러내린 벚꽃나무 가지와 담장에 넘실대는 푸른 이파리들을 바라보라. 분명 세상사에 찌들리고 얽히고설킨 마음들을 맑히기에 충분하리라. 마치 시골집 같은 분위기의 정겨운 심검당, 휘어지면 휘어지는 대로, 구부러진 것은 구부러진 대로 자연미를 살린 기둥들은 삶도 그렇지 않으냐고 물을 것이다. 더 보탤 것도 더 손볼 것도 없이 살아온 그대로가 기둥이 되고 문턱이 된 이런 자연함이야말로 우리가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마음 밝히기」


늘샘 최원현 선생의 낙관 중 두 인은 淸心이다. 청심은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은 '잡념을 없애어 마음을 깨끗이 함. 또는 그 마음.'이다. 선생은 예의를 중시한다. 자신의 책을 줄 때 그냥 주지 않는다. 꼭 책 앞뒤에 간지를 넣어 한 장은 책날개에 끼운다. 그리고 앞 장 간지에 정성 들여 책 받는 사람의 성함 앞에 두 인을 찍는다. 아마 '이 책은 저의 정성을 담아 쓴 글입니다. 맑은 마음으로 읽어 소서' 하는 소망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또한 '늘샘'이라는 호는 '늘 솟아나는 샘'이다. 그 샘은 글 샘이다. 글 샘은 언제나 마르지 않고 우리의 가슴을 적셔줄 것이다. (202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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