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시

사무사 신기독

by 최원돈


나의 서시(序詩)

― 사무사 신기독

최원돈


시월의 하늘은 높고 맑다.

가을의 빛이 번져드는 차창 너머로,

문득 일본어 강독 시간에 읽은 한 문장이 떠오른다.


“가녀린 풀꽃이며 수수한 가지 꽃이,

봄에는 씩씩하게, 여름에는 선선하게,

가을에는 쓸쓸하면서도 화려하게,

겨울에는 고요히 맑게 도코노마*를 장식한다."


왜 가을은 쓸쓸하면서도 화려하다고 했을까.

버스 창가로 스치는 하늘은 깊은 심해처럼 투명하고 고요하다.

푸른빛 속에서 나는 오래 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이십 년 전, 신체검사에서 폐기종이 발견되었다.

당 의사는 “양성의 물혹이지만 오래되면 변화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수술을 권유했다. 그때 나는 별일 아니라 여기며 복강경 수술을 준비했지만,

수술 전날 레지던트의 “경우에 따라 개복 수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 담당 전문의를 찾아가 다시 물었다.

“선생님, 꼭 수술을 해야 합니까?”

그는 차분히 말했다.

“이전 기록과 비교해 보면 큰 변화는 없습니다.”


그 이후 나는 6개월마다 검사를 받았다.

변화가 없자 주기는 1년으로, 다시 3년으로 늘어났다.

CT 대신 일반 X-레이로 바뀌면서 내 마음의 불안도 조금씩 옅어졌다.


오늘도 병원을 찾아 X-레이를 찍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병원 한쪽에 있는 경교장(京橋莊)에 들렀다.

이곳은 김구 선생이 서거할 당시 머물었던 곳이다.

기념관에는 붓글씨 두 점이 걸려있다.


하나는 사무사(思無邪)

다른 하나는 신기독(愼其獨)이다.


사무사는 ‘삿된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신기독은 ‘홀로 있을 때 스스로를 바르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두 작품 모두 김구 선생이 생전에 다른 이에게 선물하려 쓴 글씨라 한다.

그 옆에는 서거 당시 입고 있던 무명 저고리가 총탄 자국과 함께 걸려 있다.

피 묻은 천 위로 번진 기운이 묵직하게 내 가슴을 울린다.


진료실로 돌아와 들은 담당의사의 말은 여전했다.

“큰 변화는 없지만, 폐기종의 상태는 X-레이로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이 년 뒤에 CT를 다시 찍어봅시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 정원의 벤치에 앉았다.

분수대의 물줄기가 햇빛에 반짝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두 글귀를 다시금 되뇌인다.


思毋邪 愼其獨.

이 말이 요즘 내 심정에 유난히 와닿아

나를 돌아보게 한다.

윤동주의 서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기엔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내속의 서운함과 미운 마음은 지워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살다 보면 서운한 일도, 미운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설혹 믿었던 지인이 등을 돌린다 해도

그 서운함에 오래 머물러 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세상사는 언제나 오르내림이 있으니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덤덤히 지나가야 한다.


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그저 나의 소신대로 묵묵히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이 세상 소풍을 마칠 때,

미련 없이 털고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무사 신기독.

삿된 생각을 버리고,

홀로 있을 때 자신을 바르게 하라.

이 한마디가

오늘 나의 서시(序詩)가 된다.


정원의 나무들은 어느덧 노랗게 번져

붉은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래서일까.

가을은 언제나 쓸쓸하면서도

그 어느 계절보다 화려한 것인가. (2025.10.02.)


*도코노마: 일본 전통 가옥의 한쪽에 바닥보다 조금 높게 만든 공간으로 꽃꽂이나 족자를 걸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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