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몸이 아프고 불편하면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는 다른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빨리 몸이 낫기만을 기다립니다. 이 기다리는 동안에는 몸이 다시 건강해지면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계획도 세우고 건강했을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도 하면서 건강을 위해 더 노력을 하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강 상태가 나아지지 않거나 나빠지면 다른 일들을 계획하거나 변화를 생각하지도 않고 현재의 건강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빠지면 그 느끼는 절망감은 훨씬 크게 다가와서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요즘은 날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저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마음에 점점 더 건강해지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시작한 것이 걷기와 뛰기입니다. 하루에 아주 느리게 30분을 걷고 1분 10초를 중간 속도로 뛰는데 어제는 욕심을 부려서 1분 30초를 뛰고 난 후 고생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1분 10초만 뛰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더니, 힘은 들었지만 좀 누워서 잠을 자고 일어나니 다시 움직일 만합니다.
내가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아무 어려움도 없고 편안한데 굳이 힘들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고 뛰는 데는 내가 느끼는 고통의 총량에서 순간의 고통보다 그 지속 시간이 주는 고통이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법칙 중에 임계점이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물의 끓는 임계점은 섭씨 백도이고 어는 임계점은 섭씨 0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고통의 임계점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느끼는 고통에도 분명 임계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고통이 심해지면 느끼는 것도 더 심해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 강도를 측정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저는 이 상태가 고통의 임계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통의 총량은 이 강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의 지속 시간에 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수학에 비유하자면 적분에 해당한다고나 할까요? 일정한 시간 내에서의 고통은 각 순간에서의 고통을 모두 모은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순간의 고통보다는 그 지속 시간에 더 치명적입니다.
강한 고통이 짧게 지속되면 금방 잊히지만 강도는 약한데 그 고통이 오래 지속될 때 그 총량에서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이거나 심리적으로 움츠러드는 고통이 오래 지속될 때 더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나는 가만히 있으면 특별히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서 있거나 좀 움직이면 힘이 듭니다. 고통의 강도는 약하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 더 절망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고통의 강도와의 싸움보다는 그 지속되는 시간과의 싸움이 더 어렵기 때문에 나는 그 지속 시간을 줄여 보려고 고통의 강도가 강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통만 그런 게 아닙니다. 행복의 총량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생활은 행복의 강도보다는 지속되는 시간에 더 영향을 받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아주 짧습니다. 그러나 집을 사거나 승진을 하면 그 지속력은 좀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작은 행복감을 자주 느낄 수 있거나 오래가는 것들 순으로 먼저 하는 것이 행복의 총량이 많아집니다.
하루하루 생활하는 동안에 고통의 시간을 줄이고 행복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서 고통의 총량보다는 행복의 총량이 월등히 많은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