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 이러려고 여길 왔나?

Los Arcos에서 Logrono까지

by Sal

원래는 로그로뇨 바로 전 마을에서 멈추려고 했는데, 걷다 보니 관성의 법칙에 의해 결국 29km나 걸어버렸다.



알베르게 파로키알 데 산티아고(Albergue Parroquial de Santiago El Real),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숙박도 무료, 저녁과 아침식사까지 무료제공이다. 물론 기부통이 있어서 거기에 소신껏 기부를 하면 된다.


다 같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데 한 스무 명 정도의 각국의 순례자가 한 방에 모였다. 간단한 각자 소개를 진행하고 샐러드와 파에야 그리고 순례자 중 한 명이 협찬한 와인까지…. 그리고 매우 많은 수다들과 웃음들…. 매우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실 당연히 색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 인생 내내 코리안 색으로 살다가 갑자기 저 멀리 스페인까지 와서 이렇게 다국적으로 무지개색의 저녁식사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 색이 다르지 않을 수 있을까? 금전적으로 많은 기여를 할 여건이 되지는 않았기에, 우리도 뭔가 다른 기여도 한다. 역시 노동력 협찬이다. 식사 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내 옆자리에는 미국에서 온 60대로 보이는 리처드, 그리고 앞에는 리처드와 같이 걷는 중인 밥과 찰리가 앉는다. 그중에 약간 고지식해 보이고 공붓벌레 느낌의 찰리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순례자길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왔니?” “아니.”

“뭘 얻어가려고 왔니?” “뭐 딱히 없는데.”

“지금까지 제일 힘든 건 뭐니? “당연히 발 아픈 거지.”


또 오늘 저녁에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딸이 화상통화로 우리에게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대충 이런 생각들이다.


‘오늘 목적지 마을까지는 얼마나 남았을까?’

‘아 아프다, 어떻게 하면 안 아플까? 아니 조금이라도 덜 아플까?’

‘도착해서 약 바르고 쉬면 내일은 나아지겠지. 언제쯤 적응되어서 안 아플까?’


주로 몸 상태에 대한 생각이 대부분인 것 같다. 인생, 깨달음, 해탈? 여보세요?ㅎㅎ



패션쇼


내가 누운 자리의 대각선 방향에 매트리스 하나 깔고 누워있는 프랑스 언니는 이미 한 달 넘게 걸어왔고 앞으로도 한 달 정도 더 걸어서 산티아고까지 간다고 한다. 그 언니의 오븐에서 갓 꺼낸 것 같은 새까맣게 탄 종아리를 보니 걷는 데에는 이골이 난 모양새이다. 내 다리도 저 정도가 되면 아픈 것은 덜 생각하고 다른 생각도 조금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까? 아니 나도 제발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프이~~~즈…….


마트에 다녀오니 그 프랑스 언니를 포함해서 같이 어울리던 세 명만 큰 홀에 남아서 즐겁게 무언가를 하고 있다. ‘패션쇼’를 하고 있었다. 셋이 배낭짐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각각 배낭에서 최근에 사용하지 않은 것을 내놓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자 자기가 가진 옷을 입는 패션쇼를 하고 관객, 나머지 두 명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거나 필요 없다고 평가하는 옷은 빼놓기로 하는 거란다. 호주 오빠와 프랑스 언니 두 명은 이미 끝났고 이제 마지막으로 독일 라우라 언니 차례이다. 운동복, 빨간 드레스 등을 입고 나서 “안돼, 이건 세트야…”라고 버텨 보기도 했지만 판정단의 판결에 승복하고 우리에게 반팔티를 하나 양도하면서 짐을 조금 줄이는 데 성공한다. 패션쇼가 끝나자 프랑스 언니는 이제 다른 정비를 좀 할 때라면서 핑크색 쿨팩 같은 것을 빼더니 다리에 정성스레 붙인 후 한 번에 화악 뜯어낸다. 다리털 제거! 좌악! 그리고 우리에게 자랑을 한다. 봐라 매끈하지? 정작 우리는 당장 입지 않는 옷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뺄 것들도 많이 있는데, 버리지를 못하네…… 아직 내려놓질 못하네? 아직 덜 힘드나?


오늘은 드디어 집 떠나온 지 처음으로 식당에서 점심 외식을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아직 에너지가 충만한 오전에 열심히 걸었다. 오로지 점심을 먹기 위해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토티야 데 파타타(Tortilla de Patata)와 무슨 무슨 타파스(Tapas)를 주문하고, 맥주와 커피 한 잔씩 놓고 앉았다. 오전 내내 땀 흘리며 걷다가 이제는 골목길 그늘에 시원하게 앉아있고, 10kg 무게의 배낭을 내려놓으니 어깨가 날아갈 듯하고, 노오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갑자기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도파민이 충만해진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죽 늘어선 바들, 그리고 그 골목길 한쪽으로 나란히 배치된 파라솔과 테이블에서, 나는 맥주를 한잔 들이켜며 지나는 순례자들에게 시크하게 한마디 던져준다.


“올라! 부엔 까미노!”


이러려고 여길 왔나?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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