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Najera에서 Santo Domingo de la Calzada까지

by Sal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보니 반갑네.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를 지나 나헤라(Najera)까지 거의 60km를 이틀에 걸쳐서 걸으면서 우리와 까미노 둘째 날부터 만났었던 피에르, 안드레와 헤어졌다. 그런데 그들을 다시 만났다. 격한 허그까지 하면서 반가워한다. 반갑네….ㅎ 아침 7시 40분에 출발해서 5.5km를 걷고 커피 한잔,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해서 또 2시간 동안 10km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한 시간 동안 5km를 더 걸어서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원래 계획은 점심을 먹은 후에 7km 정도를 더 걸어서 다음 마을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점심때쯤 도착한 산토 도밍고 데 칼사다 광장의 파라솔 아래에 프랑스 비아리체에서 온 쟝이 여러 순례자들과 함께 앉아 있다. 우리도 여기저기에 아는 얼굴과 인사를 한다. 맥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수다를 떨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내 머리가 슬슬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순례길 걷는 내내 쉬던 머리가 잠깐 힘을 내더니 오늘은 여기에서 멈출 핑곗거리를 열심히 찾아낸다. 이틀 동안 60km 가까이 열심히 걸었으니 오늘은 내 오른쪽 다리 상태를 봐서 쉬기로 하자. 게다가 그 햇살 따뜻한 파라솔 바로 앞에 괜찮은 알베르게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레이저 광선이 다발로 내려오는 것 같은 햇살과 오전에 열심히 걸어서 예상보다 좀 일찍 도착한 내 다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요구, 그리고 이 파라솔 아래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쟝의 속삭임에 우리는 너무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회유된다. 하늘의 색이 보통 물감의 일반적인 파란색이 아닌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에서 나오듯 콕 찌르면 파란색 물이 툭 터질 것 같은 느낌의 파아란 하늘, 그리고 ‘초록’ 하나만으로는 부족한 ‘초록초록초록’한 가로수들, 신상 박스에서 막 꺼내서 설치한 듯한 티 하나 없는 하~얀색 사각 파라솔, 그리고 파란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을 한 스쿱 떠서 살짝 얹어 놓은 듯한 하얀색 거품이 위에 얹어진 노란색 맥주와 갓 꺼낸 오일로 튀긴 것이 확실해 보이는 연노랑색 파삭파삭 칼라마리(오징어) 튀김, 이 정도의 정성이면 난 즐거운 마음으로 넘어간다.


배낭을 내려놓고, 오늘 걸을 분량은 다 걸었고, 알베르게에 체크인은 해 두었으니 잠잘 곳도 확보했고, 적어도 지금의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정말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원래 내가 가끔 이런 데카당스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 흐뭇함의 강도가 훨씬 진득하다. 가끔씩은 이렇게 ‘이성, 계산, 분석, 합리’ 이런 단어들 보다는 ‘본능, 하고 싶은 것들, 충동’ 이런 단어들을 따르는 것이 좀 더 양질의 행복감을 주기도 한다.




늘 걸으면서 사진을 찍다 보니 내가 찍는 사진 대부분이 사람들의 뒷모습들이다. 계속 아이맥스영화관의 스크린보다 더 큰 화면의 경치만 보면서 걷다 보니, 원근감만 강조되는 저 멀리서 점점 가느다랗게 작은 점으로 변해가는 길과 그 위를 걷는 약간 길쭉한 까만 점 두 개가 나오는 순례자들 사진만 찍는다.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도착 전 마을 전체가 보이는 마을풍경, 마을에 들어가면 보이는 성당들과 예쁜 작은 가게들을 찍는다. 그리고 나면 꼬박꼬박 음식, 커피 사진들이 나오고 가끔씩은 순례자 조형물이 나타나면 우리도 같이 보조 출연을 하기도 한다.


기록을 위해서 가끔은 내 그림자 사진, 고생하고 있는 내 신발들과 배낭 사진, 알베르게 사진들, 그리고 매일 아침 출발 전 인증샷 한 장! 뭐 새로운 거 없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서 내가 지금 걸어가는 경로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서 더 걸어야 한다면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그 멋진 사진 찍기를 포기하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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