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

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서 Belorado까지

by Sal

오늘 걷는 구간의 마지막 마을에서 최종 도착지인 벨로라도(Belorado)까지는 거의 직선 4.8km인데 햇볕이 쨍쨍쨍쨍이다. 걷기가 만만치가 않다. 스마트폰 까미노 앱을 보면 매일매일 걷는 구간별로 각각의 난이도가 표시되는데 어떤 곳은 별 두 개, 다른 곳은 별 다섯 개…. 하지만 별 개수에 상관없이 모든 구간에는 나름의 어려움이 꼭 숨겨져 있다. 한마디로 까미노길은 쉬운 구간이 하나도 없다.



이런 일도 있네?


이제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매일 똑같이 비슷한 시간에 출발하고 비슷한 시간에 비슷하게 지쳐서 도착한다. 슈퍼에서는 비슷한 먹거리를 사고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일찍 침대에 오른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바른생활 아이의 일상을 반복하는 와중에 오늘은 조금 다른 패턴의 일상을 보냈다. 벨로라도에서는 아주 작은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온 자원봉사자 호스피탈레로(Hospitalero) 커플이 잠시 관리하고 있었고, 1층은 거실과 부엌밖에 없고, 2층에는 이층 침대가 10개 밖에 없는 가정집 같은 분위기의 알베르게이다.


먼저 체크인을 한 후, 배정받은 2층 도미토리로 내가 다리를 절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을 알베르게 호스피탈레라(Hospitalera [1])아주머니가 보시더니, 바로 괜찮냐고 물어보신다. (괜찮으면 그렇게 걸을 리가 없지.ㅎ) 짐정리를 대충 마무리하고 로비에서 A의 발바닥 상태를 체크하는데, 이번에는 A의 발바닥 물집을 보시고 소금물에 담그면 좀 낫다고 조언을 해 주신다. 그리고 대뜸 부엌으로 가서 양동이를 하나 꺼내 오더니 소금물 찜질을 준비해 주시고, 나에게는 얼음찜질을 하라고 하면서 얼음 한 봉지를 꺼내 주신다.


아주머니 덕분에 우리는 알베르게 바로 앞 의자에 앉아서 A는 소금물에 발을 담그고, 나는 옆에서 얼음찜질을 한다. 햇살은 쨍쨍, 내 발을 탱탱, A의 발은 쭈글쭈글이다. 그러더니 이걸로는 부족했는지 조금 후에는 연고와 붕대를 가져와서 내 다리를 좀 보자고 한다. 내 다리를 직접 만지면서까지 연고를 바르고 치료해 주신다. 좋다~~~ 솔직히 약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적절히 부드럽게 발목을 조이는 천 압박붕대의 느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순도 100% 이타심에서 나온 돌봄을 받는 느낌이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알베르게 앞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 알베르게 주인아저씨는 순례자들이 대부분 도착할 시간이 지나자, 일단 오늘의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알베르게 바로 앞에 앉아있는 우리와 햇살이 쨍 비치는 공터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벤치에 앉아서 우쿨렐레 연주 연습을 하신다. 귀에 익숙한 노래인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냉찜질+소금물찜질+햇살찜질’에다가 라이브 우쿨렐레 연주까지 해주니 ‘원스탑 토털케어 풀서비스’이다. 조용하게, 한가하게, 따뜻하게.


저녁식사로 ‘돼지고기 야채 스튜’를 준비한다. 우리나라식으로는 표현하면 그냥 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당근, 양파 등 야채를 큼직큼직 썰고, 돼지고기도 큼직큼직 썰고, 물도 넉넉히 넣고, 소금과 후추도 넉넉히 넣고 불에 올린다. 아… 마지막으로 마술가루(한국의 맛이 그리울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라면 스프) 하나 넣는다.


둘이 먹기에는 조금 양이 많아서 용기를 내서 주인장에게 좀 나눠 드렸더니 예상외로 무척 좋아하신다. 덩달아 우리도 뿌듯하다. 그런데 조금 후에는 이태리에서 온 움베르토와 엘레나 커플이 또 주인장에게 ‘아보나라’ 파스타 (아보카도+까르보나라)를 나눠준다. 만들 때 옆에서 슬쩍 보니까 그냥 까르보나라 파스타 마지막에 아보카도를 하나 으깨 넣는 것뿐인데 제법 그럴싸하다. 자슥들. 호스피탈레로 커플도 기분이 좋은지 같이 사진도 찍자고 한다.


저녁 식사 후에 다시 우리는 알베르게 앞 의자에 앉아서 1일 1 와인을 하면서 눈앞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챙겨본다. 조금 닭살이 돋기는 하지만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인다. 파란 하늘도 보이고 이 동네의 집도, 이끼 낀 담들도 보고 옆교회의 돌벽도 보이고 군데군데 있는 나무나 화단도 보인다. 나는 이 시간이 까미노길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제 알베르게로 들어가는데 안쪽에서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면서 들어가 보니 움베르토 엘레나 커플과 몇몇 근처 알베르게의 친구들이 이곳 다이닝룸에 모여 같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뒤풀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커플의 노래 및 기타 실력이 거의 보사노바 재즈싱어 게츠 앤 질베르토(Getz & Gilberto)급이다.


일단 올백에 꽁지머리 헤어스타일의 움베르트의 비주얼과 그의 기타 연주실력에 한번 제압당하고, 아프리카의 작은 섬나라 까포 베르데(Capo Verde)에서 온 작은 체구지만 1층 거실 공간을 다 채우는 듯한 포스로 혼자 노래를 부르는 엘레나에 의해 다시 한번 휘어 잡힌다. 여기에 주인장 아저씨의 우쿨렐레와 스위스 목동 같은 깔끔한 목소리도 한몫을 제대로 하고 있다.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Girl from Ipanema)’를 마지막 곡으로 알베르게 소등시간인 10시까지 이 라이브 공연은 계속되었다. 오늘의 재즈커플 싱어들에게 뭐라고 감사의 말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조금 상투적인 작업용 멘트 느낌이 나지만 이렇게 말해주었다. “You made my Camino perfect!”


노래실력이 30점, 가수들의 표정과 그루브가 30점, 다 같이 따라 부르는 분위기가 30점 그리고 여기에 내 취기 10점까지 더한다면 오늘은 100점짜리 공연이었다.


부에나스 노체스(Buenas Noches)! 아름다운 밤이에요!




[1] 스페인어 단어는 대부분 -a로 끝나는 단어는 여성형이다. 예를 들면 Nino는 소년, Nina는 소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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