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이러려고 왔다. 그래도 아프다. 여기저기가…

Logrono에서 Najera까지

by Sal

이틀에 걸쳐 약 60km를 걸었다. 새끼발가락의 발톱도 너무 아프고, ‘오금이 저린다’는 말에 나오는 그 오금, 바로 오른쪽 무릎 뒤쪽이 너무 아프다. 종아리부터 발목까지는 피부가 벌겋게 되었고 날씬하던 종아리가 터질 듯이 탱탱볼처럼 부었다. A는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 아래쪽 발바닥에 정원에 놓는 튜브수영장 사이즈의 큰 물집이 잡혀 있다. 가장 처음 생겼던 물집 부분은 점차 아물어가지만 그 주변으로 COVID-19 만큼의 속도로 새로운 물집이 확산되고 있다. 물집 안쪽에는 피고름 같은 것들이 차 있고, 바늘로 터뜨렸지만 계속 밟히면서 와서 그런지, 물집 안의 고름? 아님 액체가 걸쭉해서 잘 빠지지도 않는다. 지금은 아예 물집에 바느질을 하고 있고 다리 군데군데에는 파스를 더덕더덕 붙이고 있다.



까미노길을 걸은 지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아서 빨래도 좀 보송보송 말리고, 알베르게 바깥에 앉아서 광합성을 하는 여유도 부려본다. 오늘 저녁은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알베르게 안의 다이닝룸이 아닌 오늘의 종일근무를 마친 후에 퇴근하는 해가 보이는 앞마당의 한가한 벤치에서 우리도 한가하게 저녁을 먹고 있다. 젊은 한국언니나, 유튜브 영상을 찍는 커플도, 종종 길에서 만나는 이스라엘 출신의 언니들도 바깥으로 ‘오늘의 세트메뉴(Menu del Dia)'를 먹으러 나가는 것 같다. 한국 언니 한 명이 혼자서 우리 앞 벤치에서 커피와 빵을 먹는데, 같이 먹자고 할 걸 그랬나? 우리도 너무 오랜만에 둘이만 하는 한가한 식사라서… 이기적으로? 우리끼리 조용히 파스타와 와인을 먹는다.


호주에서 온 애비와 메리는 조금 늦게 저녁준비를 시작해서 아직 주방에서 요리 중이고, 한국의 전문 산악인 포스의 아저씨들은 오늘 모처럼만의 양파와 삼겹살구이를 드신다고 한다. 역시 여행 전문가답게 주방이 복잡해지기 전에 일찍 저녁식사를 해결하신 것 같다. 네덜란드 출신인데 굳이 본인을 홀란드(Holland)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피터(Peter) 아저씨는 아보카도 샐러드를 만들어서 말을 전혀 안 or 못하는 친구와 같이 먹는다.


모두들 걸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새벽부터 길을 나서서 부지런히 걷고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오늘 고생한 발 상태를 정비하고... 또 내일의 하루를 보낼 준비를 마친 후에는 다들 이렇게 삼삼오오 어울리면서 다양한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어느 누구도 딱히 무언가 한 가지 멋있어 보이는 그럴싸한 목표를 위해서 달리는 사람들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같이 걷고, 같이 먹고, 비슷하게 아파하고 대충(언어가 좀 다르니까) 같이 공감한다. 대충 이러려고 이곳에 온 것 같다.




피코 할아버지


쿠바인 아버지와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 어머니를 두고, 본인은 프랑스인인 피코(Pico) 할아버지는 비슷한 또래의 가족 친지들과 까미노를 걷고 계신다. 전체 까미노길을 다 걷지 않고 몇몇 구간을 걸으시는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우리와 에스테야와 로스 아르코스에서 같은 알베르게에서 지내고 있다.


나이 든 알파치노 외모의 피코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걷는데 배낭이 아닌 트렁크를 끌고 다니시면서 짐은 동키 서비스로 보내 버리고 약간의 짐만 가지고 걷는다.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한 날에는 우리가 침대 정리를 대충 마칠 때쯤 나이 드신 분들 한 무리가 들어오시는데 피코 할아버지가 보인다. 그날은 비도 오고 해서 날씨가 제법 추워서 선천성 ‘추위포비아 허약체질?’인 나는 샤워 후에 면티+셔츠+패딩조끼+바람막이로 중무장을 했다. 아마도 짐이 무거워서 못 가지고 갔으니까 이 정도였지 아마도 걸칠 게 더 있었다면 더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피코 할아버지는 샤워를 막 마치고 나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이 이층침대로 가득 찬 도미토리를 휘젓고 돌아다니신다. 이층 침대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피코 할아버지를 처음 만나서 길~~게 공부했지만 아직 한참 짧은 우리의 스페인어로 몇 단어를 뱉었더니, 그 후로 피코 할아버지는 A를 보기만 하면 우리의 스페인어 실력?을 맹신하는지 스페인어 폭격을 해댄다. 그것도 안 가린 부위보다는 가린 부위가 훨씬 더 적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바로 그 차림으로…. 그리고 A에게 하는 말이 “니 남편, 저기서 딴 여자에게 말 걸고 있다.”이다. 자기는 팬티차림으로 남의 부인에게 말 걸면서… 헐.


오늘도 아침에 얼굴을 보자마자 스페인어 기관총을 쏘신다. 민호스타일의 [1] 츄리닝 차림으로, 77세인데….




[1] TV에 나오는 ‘민호’ 이름이 너무 많아서 혼란을 야기시킨다고 한다. 여기에서 민호는 가수 ‘위너’ 소속의, 신서유기에 나오는 ‘민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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