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tella에서 Los Arcos까지
오늘은 드디어 와인 분수를 만나는 날이다. 하루 전부터 알베르게에서 만난 젊은 친구들마다 내일은 거기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런데 두 시부터 잠이 깨서 유체이탈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자야 되는데 눈이 말똥말똥!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많은 식량을 걷는 동안 보충했다. 호두, 블루베리, 블랙베리 아니면 오디, 무화과, 포도, 사과, 밤, 이 정도가 10월 까미노길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는 식량이다. 하지만 이 열매들은 배를 채우는 식량이라기보다는 걷는데 지루함 또는 아픈 발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데 도움을 더 주는 편이다.
먼저 블루베리는 역시 짙은 파란색이 맛있다. 맛이야 야생 열매이다 보니 가끔은 단맛이 나는 놈을 찾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떫은맛이다. 일단 입에 집어넣고 대충 씹다 보면 그 떫은맛만이 입안에 가득하다. 이후로는 오로지 입안의 근육과 혀만 이용해서 이 지뢰 맛을 하나하나 제거하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언덕을 하나 넘기도 하고, 저 멀리 보이기만 했던 지평선에 내가 순간이동을 해서 도달해 있기도 하다. 입안 곳곳에 자리 잡은 아주아주 비싼 풀바디 와인의 탄닌맛 같은 이 떫은맛을 찾아서 제거하는 게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
블랙베리는 걷는 길 내내 많이 볼 수 있어서 공급이 가장 원활한 편이다. 가시들을 조심해야 하지만 알이 크고 까만색으로 고르면 맛도 제법 괜찮다. 다만 블랙베리는 작은 씨가 많다. 백화점의 블랙베리 잼에는 토도독 씹히는 수준이지만 역시나 ‘야생’이다 보니 무시하고 씹기를 시도했다가는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곳에서 치과에 가야 하는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 작은 씨들은 골고루 이 사이에 박히는데, 그 이 사이사이마다 낀 씨들을 제거하다 보면 또 언덕 하나를 넘을 수 있다.
이 까미노길에 오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정도의 많은 양의 에너지를 매일 꼬박꼬박 사용하고 있으니, 몸에서 세끼 식사로는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수시로 뭔가를 입에 넣어 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이때 나머지 식량인 무화과, 사과, 포도, 밤은 훌륭한 에너지 간식이 된다.
무화과는 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간식이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은 무화과보다 까미노길에서 먹은 무화과가 더 많다고 확신한다. 안타까웠던 점은 아무래도 내가 평균 키의 동양인이다 보니 그나마 순례자들이 따지 못한 잘 익은 놈들은 항상 높은 곳에 달려있어서 내가 딸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간간이 나타나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양손 가득히 따면 껍질 채 순식간에 먹어 치우지만 그 느낌은 입에서 멈추지 않고 식도를 지나 아랫배 근처까지 전달되는 게 만족도가 제법 오래간다.
사과는 나무에서 직접 따지는 못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바닥에 떨어져서 굴러다니는 사과 중 깨끗한 놈으로 시식을 시도해 보았다. 잘 고르면 싱싱한 맛 그 자체이다.
리오하(Rioja) 지방의 포도 산지를 걸으면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것이 모두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뿐이니 살짝 시식해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포도송이가 너무 커서 거의 바닥에 붙어있는 내버려 두면 썩을 것 같은 한 송이를 ‘이건 내버려 두면 음식낭비야’라고 하면서 먹어보았는데, 아이스와인이나 무스카토 와인처럼 왜 와인에서 신기하게 꿀맛이 나는 지를 충분히 이해가 가게끔 해주는 꿀맛 포도맛이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샤인머스캣 포도? 는 여기 리오하 지방의 포도에 비하면 ‘샤인레스(Shineless) 머스캣’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밤은 순례길의 마지막 자치주인 갈리시아(Galicia) 지역에 갈수록 모든 길이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밤천지로 바뀐다. (여기가 웃는 포인트인데… 아재 개그!) 도토리나 밤은 야생동물이 먹도록 사람이 줍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산길이나 마을 길이나 밤이 길 한쪽에 쌓여 있는 수준이고, 말 그대로 지천(至賤, 너무 흔해서 더할 나위 없이 천한 것)으로 흔한 수준이기 때문에 다람쥐에게 눈곱만큼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물론 내가 먹고 싶어서 먹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인간이 동물로 태어난 이상, 식물이 지난 수개월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생산한 결과물을 그들이 의도한 대로 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동물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려한 색의 껍질과 새콤달콤한 과육 그리고 삼키기 어렵게 만든 씨앗, 이 모두가 식물이 종족 번식을 위한 짜 놓은 원대한 계획인데, 이 계획의 마지막 단계인 우리가 이 열매를 먹어주지 않는다면 식물이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 우리 동물이 열매를 따고, 입에 넣고, 씹어서 씨앗만 입안에서 돌리다가 잘 자랄만한 곳에 툭 뱉어 주는 것은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동물로서 그 능력이 없는 식물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의무이다. 물론 하루 정도 숙성을 시켜서 다른 장소로 옮겨주는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그것은 생략하고 아무튼 이렇게 마무리를 잘해줘야 지구가 더 푸르고 건강하게 유지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걷노라면 1
추수를 마친 이후라서 그런지 로스 아르코스까지 가는 길은 길을 걷는 내내 주변의 색이 초록초록하기보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장군이 손으로 밀밭을 훑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런 느낌의 드넓은 평야가 자주 펼쳐진다. 가끔씩 비가 흩뿌리기도 하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도 하고 햇빛이 쨍하기도 하는 길을 고객의 요구사항에 맞춰서 비옷을 입다가 챙 넓은 모자를 쓰다가를 반복하면서 걷는다.
그런데 어디에서 익숙한 고향의 냄새 아니 내가 좋아하는 발 냄새 치즈 냄새가 예고도 없이 서라운드로 후욱 들어온다. 정신을 차리고 냄새의 주범을 찾아보니 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멋있어 보이는 들판에 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좀 가까이에서 보니, 들판 위로 온통 까만색의 덩어리들이? 골고루 뿌려져 있다. 아… 이 동네 친구들이 왜 발 냄새나는 치즈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이 냄새와 친하게 지냈으니, 우리의 마늘 냄새나, 청국장 냄새나, 홍어회 냄새처럼 이 묵은 발 냄새 치즈의 냄새가 바로 고향의 냄새였었네…. ㅎ
게다가 좀 걷다 보니 들판에 까만색의 거대한 언덕이 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것은 치즈냄새라기보다는 유통기간이 한참 지난 변질된 염소치즈 냄새다. 아 발냄새가 아니라 ‘?’ 냄새였구나. 없는 힘까지 짜내서 이 구간은 '쾌쾌쾌’ 쾌속으로 걷는다.
걷노라면 2
저 멀리 오르막길이 보이고 그 끝에 깨알만 한 순례자가 보이면 사진은 멋있게 나올지 모르지만 일단 언제 저기까지 갈까 하는 생각에 좀 갑갑답답 한숨이 나온다. 동시에 날씨까지 비협조적이고 새끼발톱의 고문이 지속적으로 진행형이면 폼나게 길을 나서기는 했지만 당장의 괴로움에 ‘폼생폼사’가 아니라 이러다가 ‘폼생괴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득 나도 현역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친 대한민국의 청년인 적이 있었다고 갑자기 군가가 머릿속에 아니 내 입속에서 흘러나온다. 그런데 이게 좀 도움이 된다.ㅋ 나도 모르게 열심히 스틱을 바닥에 찍으면서 걷다 보면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좀 거시기해서 큰 소리로 부르지는 못하지만 속으로 속으로…. ‘하나, 둘, 한, 둘, 행군 중에 군가 한발 장전... 멋진 사나이!’
반면 A는 오르막 길이 보이면 들국화의 ‘사노라면’을 몇 번 부르면 될지를 미리 계산하고 있다. 2절까지 한 5번 부르면 꼭대기에 오를 거라고 예상하고 열심히 속으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라고 한다. 사실 ‘남행 열차’나 ‘네 박자’도 훌륭하다. 아니면 우리 귀에 익숙한 쿠바 노래인 ‘관타나메라(Guantanamera)’나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 (Casa de Papel)의 테마곡이었던 이태리 민중가요라고 하는 ‘벨라챠오(Bella Ciao)’도 매우 효과적이다.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한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