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ente de Reina에서 Estella까지
약 먹고 파스도 붙이고, 발가락 물집은 드디어 좀 나으려는지 오른쪽 발의 걸음걸이가 좀 편해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이층 침대 위에서 조용히 일기도 적고, 씻고, 화장실에도 가고, 아침도 먹고, 7시 10분에 출발했다.
10kg 배낭까지 메고 걷기 때문인지 우리 걸음은 좀처럼 속도가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 출발하는 편인데,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보다 늦게 출발한 많은 순례자들이 우리를 획획 지나친다. ‘부엔 까미노!’를 서로 외치면서… 그런데 이 ‘부엔 까미노’ 다음으로 우리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 하나 더 있다.
“너 어디서 왔니? (Where are you from?” 또는 “De donde eres?”)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다음 반응은 ‘오…! 멀리서 왔네? 그런데 여기 까미노길은 어떻게 알고 왔니?’하고 물어본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이런 말을 하면 그나마 이해가 될 법도 한데, 미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 자기들도 미국에서 왔으면서? 미국 중부에서 스페인까지 거리가 약 7천 킬로미터이고 한국에서 스페인까지는 약 1만 킬로미터인데, 그다지 차이가 크지도 나지 않고, 비행시간은 더 차이도 안 나는데? 그리고 미국 사람이 까미노길을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국 사람인 우리가 까미노길을 아는 것은 신기한가 보지?
추측건대 자기 나라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아주 먼 동쪽 끝의 있는 나라로 알고 있고, 그 먼 곳에서 유럽까지 오는데 아주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 그렇게 먼 변방에서 여기까지 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런 곳에서 자기들만 아는 요즘 아주 핫한 까미노길까지 알고 찾아왔을까라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시쳇말로 우주가 본인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아주 심한 착각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의 생각이 좀 이렇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이러면 안 되지. 노노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걸 조심해야 된다.)
우리도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닷새 째가 되다 보니 길에서 또는 알베르게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걷는 속도가 비슷해서 인지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알베르게에서 여러 번 같이 묵게 되는 동료 순례자가 제법 많아졌다. 다들 비슷한 저예산 여행자들(budget traveler)이어서 인지 저렴한 취향이 비슷해서 인지 계속 익숙한 얼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하면서 자꾸 만났다. 그런데 A가 [1] 같이 걷다가 우리 옆을 지나는 사람을 슬쩍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어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왔나?”
헉 우리가 걷기 시작한 지가 겨우 5일 째인데 벌써 이 까미노길이 다 내 구역이라도 된 듯한 말투다. 우리가 처음 보는 얼굴이면 그 사람이 새로 온 순례자인가? 이런 오만방자 일자무식한 생각 같으니라고…. 조심해야겠다.
오늘 저녁에는 알베르게 바로 앞의 길 건너 바(Bar [2])에서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자주 만나던 젊은 친구들과 드디어 비어 한잔을 했다. 봉준호 감독의 팬이자 좀비 장르를 좋아하는 마테호른 근처에 사는 이태리 출신의 안드레, 30대 외모의 50세 스페인 언니 소냐, 미드 바이킹스에서 나온 주인공 라그나르의 큰 아들 ‘아이언사이드 비욘'을 닮은 프랑스어 선생님 피에르랑….
[1] 내 동행자를 어떻게 칭할까 고민하다가 ‘A’로 정했다. A급, 에이스 뭐 그런 의미로 적어봤다. 절대로 ‘아줌마’란 의미는 아니다.
[2] ‘Bar’라고 하니까 술 마시는 술집인 느낌이 들지만, 스페인에서는 Bar가 동네마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가벼운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는 곳이다. 물론 스페인은 어디를 가나 맥주와 와인은 다 파는 나라이니 당연히 술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