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부산을 간다고 KTX를 예매하러 들어가 보니 나의 오랜 KTX 계정은 휴면계정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차 탄지가 참 오래됐구나 절로 생각이 든다. 겨우 코로나 2년 차인데 기차를 타본지도, 여행을 갔던 것도 까막 득하게 느껴진다.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심장이라 어디든 자동차로 가기는 편하지만,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기도 편리하다.
갓 20살이 넘어 영국에 어학연수 간 친구와 런던서 만나 한 달을 기차로 전 유럽을 여행 다닌 나였다. 두툼한 유레일 기차표를 배낭에 매고 말이다. 너덜너덜해진 우리의 일정표는 나의 자랑이었고 말이다.
2015년 9월, 남편은 하노버에 출장을 간다고 좀 들떴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에 하노버에서 남편을 만나 같이 함부르크 여행을 가기로 야심 차게 계획을 세웠다. 하노버도 처음, 함부르크도 그에겐 처음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하노버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3시간이다. 그런 여행은 20살의 내가 트렁크를 끌고 다니던 배낭여행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차 타고 유럽을 횡단하며 잠을 잤으며 내가 자던 그 기차 칸에는 생판 모르는 남도 있었다.
그런데 6살 8살 두 녀석을 데리고 가는 이 여행은 도대체 왜 이리 두려운 것인가.
무서운데 무섭다고도 할 수가 없다. 안 가고 싶은데 안 가고 싶다고도 할 수 없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재독 첫해에 내가 이걸 해내지 못하면 지내는 내내 용기라는 것은 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리 나를 밀어붙였다. 내 마음은 마치 내 젊음은 사라지지 않았어를 부르짖는 할머니들의 빨간 옷차림새 같았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내 몸만 한 트렁크를 질질 끌고, 또는 트렁크를 깔고 죽치고 앉아서 오늘은 어디서 묵어야 하나 노숙자처럼 고민했던 바로 그곳이다. 마흔의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기차 시간 2시간이나 전에 오버오젤 우리 집에서 U-Bahn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전에 중앙역에 도착했더랬다. 준비 대마왕, 걱정 요정 수준이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20년 전의 나를 우리 애들이 만났더라면 아마 유쾌하고 생각 없이 즉흥적인 언니쯤으로 여겼을 테다.
아무리 표를 봐도 열차칸이 안 쓰여있다. 기차역에 도착해도 열차칸 번호는 안 보인다. 물어보면 좋았을 텐데 왜 나는 묻지 않았었는지 생각해보면 기차 시간만 신경을 썼나 보다. 독일 기차는 연착으로 악명이 높다. 3,4시간 연착이 되어도 착한 독일인들은 그러려니 하고 잘 기다린다.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제시간에 오지 않는 기차를 그러려니 하고 기다려도 될 터이다. 나란 사람의 독일 생활 모토가 ' 현지인처럼 살기' 아닌가?
그러나 20년 전 그 여대생의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따윈 이제 사라지고 없다. 중앙역에서는 긴 시간을 머무르기는 너무나 싫다는 생각에 사로잡았었다. 중앙역이란 서울역처럼 노숙자도 많고 낯선 여행자도 많을 것이라 여겼다. 내가 그 '낯선 여행자' 였는데. 제시간에 기차가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역무원에게 거듭거듭 제시간에 도착하는지만을 물었다. 역무원이야 당연히 제시간에 온다고 하지. 어리석게도 나는 나의 의지대로 이뤄지지 않는 세상일에 대한 포기라는 지혜를 몰랐나 보다.
기차는 제 시간을 잘 맞춰 왔다. 일단 안심이다. 아이들 손을 잡고 기차에 올랐다. 금요일 기차는 체격이 산만한 독일인들로 터질 듯 꽉 차있었다. 독일의 기차는 객차 칸이 있고 객차 칸 밖은 사람 둘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복도가 있는 형태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로 향하는 열차와 같이 생겼다.
문제는 내가 예약한 칸은 1번 칸이라면 내가 탄 칸은 10번 칸이라는 것이었다. 비좁은 칸에 올라서 표를 꺼내 들고 옆에 서있는 사람에게 영어로 물으니 10개의 이 비좁은 복도를 헤집고 가야 하는 상황인 거다. 꼬마 둘의 손을 잡고 1번 칸에 도착하니 나도 너덜, 아이들도 기진맥진했다.
자리가 마주 보고 있는 3개의 좌석이 쌍으로 총 6개였는데 노부부와 한 청년이 칸에 함께 타고 가게 될 예정이었다. 노부부의 자리는 붙어 있었고 내가 예약한 3개의 자리 중에 하나는 떨어져 있어서 노부부 중 남편분에게 자리를 좀 바꿔주겠냐고 물어보니 싫다고 한다.
Nein. 독일어로 No가 1년 동안 익숙해져서 괜찮아졌을 법도 한데, 그날 나의 멘털은 그 No가 쉽지는 않았다. No는 내가 싫어서 우리 애들이 싫어서 한 것이 아니다. 우리 부부는 나란히 붙어서 가고 싶고 얼굴 보면서 3시간 가기는 싫어. 자리를 바꾸고 싶진 않다는 의사 표시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우리가 싫어서, 내가 나라서 거부당했다고 생각했다. 착각은 너무나 멀리 간 것이다. 배려를 해주면 좋지만 배려를 선택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자유인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를 바꿔 주지 않으니 아이들이 슬슬 할머니와 할아버지 눈치를 본다. 아이들이 먼저 엄마 옆에 앉고 싶어 자리 바꿔달라고 하면 안 되라고 하길래 독일 부부에게 말을 건넨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싫데.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작은 애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큰애는 이미 Nein을 알아듣고 그저 조용히 상황을 이해하고 넘긴다. 작은애는 그렇기엔 어리다. 객차 안의 분위기는 정말 침체 위기 일로였다. 우는 딸애를 조용히 바라보는 노부부의 눈길을 느끼면서도 토닥토닥 작은아이를 두드리며 괜찮아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표현을 아름답게 해서 자리 바꿔주기 싫다는 말을 부드럽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건 한국인의 정서다. 아이가 안 해준다고 운다고 해서 봐주진 않는 것이야말로 독일인의 정서다.
같이 칸에 타 있던 청년이 너덜너덜한 나에게 , 영어로 슬슬 말을 걸어온다. 딸아이가 워낙 목청이 좋아서 울음으로 객차 안을 다 채우고 있었는데 곧 또 잠잠해지기 시작하니 그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잘하는 영어는 아니었지만 어딜 가냐, 나도 집이 하노버다, 나는 며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한다는 등의 자기소개를 해댔다.
생각해보니 그 청년 딴에는 노력을 한 것이었다. 아이스브레이킹. 하노버까지 가는 그 긴 시간을 그는 즐겁게 가고 싶었던 거다. 그도 노부부의 단호한 독일스러움에 좀 미안했었나 보다. 독일인들은 하지 않는 쓸데없는 자기소개 따위를 나에게 했으니 말이다. 목청 큰 딸의 반응에 내 정신줄이 나가서 그의 호의는 전혀 못 느끼고 자꾸 말 걸어서 귀찮았다. 지금에 사 그에게 미안하다.
기억의 저편에서 스멀스멀 떠오르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들은 지금의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할 때가 많다. 이유도 없이 괜스레 불안해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하는 순간에는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본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니 조금만 여유를 가져보자라고 말해본다. 진실은 숨겨져 있어서 노력을 해야 보이는 법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옳은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틀린 것도 아니다.
남의 나라 살이를 내 나라 살이 같이 해보겠다고 좌충우돌한 덕에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그 속에선 과연 내가 진실을 바라보고 지혜를 얻었던가? 아니면 시간차 공격처럼 다 지나고 난 지금에서야 홀로 끄덕끄덕 그 시간들이 주는 교훈을 깨닫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