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고구마는 비추합니다.
고구마의 계절이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고구마를 캐러 체험을 나가고 고사리 손으로 주먹보다 좀 더 큰 고구마를 캐어서 의기양양하게 들고 왔었더랬다. 힘들었는지 아이 얼굴에 다크 서클이 가득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의 기억들은 늘 독일 가기 전에 머물러 있는 걸까?
유럽의 고구마는 물고구마도 아닌 것이 단 맛은 1도 없다. 무르기만 무르고 색만 당근보다 고운 주홍색이라 구워 먹어보면 딱 그냥 무른 당근이다. 그나마도 독일 당근이 워낙 맛이 좋고 아삭아삭한지라 , 독일 당근 하고는 경합이 안되고 샐러드에 넣어 먹거나 고구마 칩으로 많이들 먹는다. 프렌치프라이 , 삶은 감자, 구운 감자가 물릴 때는 고구마칩도 꽤 괜찮다. 감자의 나라라 김치 먹듯 감자가 나오니 고구마칩이 반가울 만큼 감자가 지긋지긋한 때도 온다.
2015년 1월, 큰 아이의 홈룸 선생님 L이 국제학교는 각 나라 명절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행사이니, 기념할 만한 명절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한다. 곧 있을 Lunar new year, 구정에는 무엇을 하냐고 묻는다. 홈룸 선생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날이 제일 큰 명절인 줄 뻔히 아시고 행사 진행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한국 아이들이 여럿 Primary 스쿨, 국제학교 소속 유치원을 지나갔으니 모르실 리 없다. 독일 온 지 며칠 만에, 짐도 없이 지내고 있는 터라 행사 따위는 할 겨를이 전혀 안된다. 그런데 나는 천상 No를 못하는 미련 곰이다.
게다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보니 아이들이 함량 미달같이 느껴져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의 의사소통에 이 파란 눈의 선생님이 얼마나 공을 들여 주실 것인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이 교실을 바라보았다.
엎친 데 겹친 덕으로 작은 아이는 매일 교실 앞에서 울었다. 울음이 너무 길어지면 Homeroom 선생님 K는 나를 호출해서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거나 , 교실 안에 함께 있길 요구했다.
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나는 음식을 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나만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설날 음식은 떡국과 고구마 전이였다. 친정 엄마의 고구마 전은 ,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나의 쏘울 푸드였다. 그것을 먹고 자란 나니까 그리고 하는 것도 여러 번 본 나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실패 확률 제로의 고구마 전이라고 자신했다.
결과는 망했다.
나의 실험 스케줄은 이러했다. 먼저 점심시간 12시까지 가져가기로 홈룸 선생님께 약속을 했으니까 고구마전은 미리 부치고 떡국은 끓여서 냄비로 들고 가서 불지 않게 아이들에게 나눠줘야지 했다. 아침 9시쯤 슈퍼에 가서 사 온 고구마를 10시 정도에 옷을 입혀서 부쳐 보았다. 보기엔 멀쩡 했다. 하나를 딱 먹어보니 이게 웬일 인가! 상한 당근처럼 식감이 물컹했다. 아, 독일 고구마는 정말 단맛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싶었다. 아마 1년 후의 나였다면 고구마를 칩으로 만들어 튀겼을 것 같다. 근데 그날의 나는 내공 제로의 외국인였다.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혔다. 시간은 12시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 말이다. 일단 떡국을 끓이고 고구마전을 싸서 Primary로 향했다.
문제는 고구마가 아니었다. 떡국이 문제였다. 아들 반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영어로 설날 우린 이런 거 먹어하고 알려주고 냄비째 들고 간 떡국을 종이컵에 담아 주었다. 애들 표정이 알쏭달쏭했다. 신난 아들은 허겁지겁 먹는 중이었다. 카페테리아에 나오는 점심 가격은 5유로, 6000원이나 했지만, 아들은 먹을 수 없었다. 입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쫄쫄 굶고 오기가 일쑤였는데 엄마가 떡국을 배달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아들 말고 한 명 더 잘 먹는 애가 있었다. 엄마가 태국 사람인 J는 신나게 두 번 세 번 더 달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 다 금발이라 도무지 구분하기가 힘든 독일 아이들과 몇몇 미국 애들은 이 찐득하게 달라붙으면서도 미끄덩한 떡을 먹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이 이런 식감 난생처음이야였다. 시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한국서 꽁꽁 싸서 이민 가방에 넣어온 국간장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해올 것을 싶었다. 아까운 국간장!
고구마야 거의 손대는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홈룸 티쳐 L은 다정하게도 고구마를 하나 드셔주셨다.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차마 맛이 괜찮냐고도 묻지 못했다. 맛없으니까 말이다.
사실 큰 아이반 행사 전날, 작은 애와 같은 반인 한국인 P양의 엄마에게 작은애 반에서도 설날 행사 겸 해서 음식을 좀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P의 엄마는 독일서 지낸 지가 오래고, 돌아갈 날이 곧 다가와 신입인 나에게 모르는 것은 뭐든 도와주겠다는 친절한 엄마였다. 혹시 참여하고 싶을 수도 있고, 국제 학교 경력이 4년이나 되셨으니 왠지 경험도 많을 것 같아서 내심 긍정적인 답을 기다렸다. 비록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녀였지만,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라던가, 행사를 이런 식으로 같이 해보자는 그런 힘 나는 답을 바라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래도 행사하신다니까 잘 되시길요. 저는 행사하시는 날 P의 가방에 한과를 좀 사넣어 보낼게요. 그날 나눠주세요. "
보내준다는 한과만 해도 고마웠다. 그녀의 말투에서 내가 느낀 '넌 너무 오버야'는 나의 착각일 것이다.
P양이 국제 학교 다니는 내내 그녀는 교실에서 전통행사는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물론 난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전직이 스튜어디스였던 P의 엄마는 영어도 잘했을 것이고 또한 아이들 앞에서 말하기도 나보단 능숙하셨을 것이다. 막연히 그녀가 긴 재독 기간 동안에 학교 행사를 한 번은 했겠지 짐작한 것은 나였다.
앞으로 나의 시간들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나 했다. 당장 말 한마디가 안 통하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팔짱 끼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든 해야 내가 살 것 같았다. 남편의 주재 계약과 독일 비자 문제로 난 독일에서 취업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9시부터 2시 또는 2시 반까지 아이의 울음소리를 귀에 달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도 나에겐 불가능했다.
P양은 아주 처음부터 울지도 않고, 영어도 준비된 상태로 독일 생활을 시작했었던 걸까? 그녀의 아이들은 이런 설날 행사 따위는 하지도 않아도 될 만큼 그런 자연스럽고 멋진 학교 생활 연속이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물론, 나의 고구마전은 망했지만 망하진 않았다. 나의 첫 국제 학교 명절 행사였으며, 처음으로 Parent volunteer 봉사활동의 출발을 알린 날이었으니 실패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 않다. 고구마전의 이름은 시도였다. 큰 아이가 하루 점심을 잘 먹은 날이었으며, 우리 엄마가 학교에 왔다고 어깨에 힘도 좀 들어간 작은 시도였다. 나와 아이들의 국제 학교 생활은 자연스럽고 멋진 학교 생활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지만, 실패는 아니고 늘 시도인 나날들이었다. 오늘 나의 부엌에서 맛있는 한국 고구마로 맛탕을 만들며, 독일 고구마는 도대체 왜 그리 맛없어하고 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인 나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