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글들은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있다. 글쓰기의 시작은 블로그라 네** 블로그는 집처럼 편안한 공간이다. 하루에 조회수가 100회 될까 말까 한 SNS다. 200년 전으로 옛날로 치면 동네 서당 정도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체력이 되는 한에서 쓰는 포스팅은 30억짜리 집들에 둘러싸인 강남 전세살이와 한국 공교육에 적응 그리고, 한국이라는 자본주의에 적응하기 위한 발버둥의 일환인 경제 신문을 읽은 것에 대한 내용이다. 간간히 밝은 내용의 브런치 글은 블로그에도 포스팅한다. 꿩 먹고 알 먹고인데, 브런치에 쓰는 글들이 고슴도치 성 내용이 대부분이라 재 포스팅의 고효율 케이스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유리로 만든 집 마냥 작은 공동체였던 주재원이라는 그룹에서 빠져나와 서울이라는 광장에 던져지니, 블로그와 브런치와 같이 혼자서 끄적거리는 글들이 나와의 약속이 되고, 살아갈 힘이 된다.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만은 멀쩡하기 때문이다.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힘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밝힌 대 화가들 중에서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다 보니,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종종 눈에 띈다. 인간은 인간 사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고통을 겪다 보면, 창작 욕구가 불 붓나 보다. 조회수 100회 미만의 블로그지만, 나의 현재를 살리는 힘이 되니, 브런치와 마찬가지로 호박씨에겐 어마어마한 의미의 소우주다.
일상에 대한 일기를 쓰는 것은 돈은 안된다며, 블로그 컨설팅을 해주시는 분들이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콘텐츠를 써야 블로그 조회수가 빵빵 터진다고 한다. 블로그가 빵 터진다는 것은 블로그가 돈이 된다와 동의어인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 컨설팅은 작게는 십만 원, 많게는 백만 원이 넘는 강의도 있더라. 글의 힘이 아니라 글을 쓰는 영혼의 힘이다. 내 영혼이 담긴 글이 여럿을 살리면 참 좋겠지만, 당장은 내 영혼에 인공호흡을 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닐까?
정상 등교로 아이들이 3시가 넘어야 집에 오는 일상이 시작됐고, 두렵기 시작했다. 혼자 집에 남겨질 자신이 없을 수도 있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공황발작도 겪은 사람인데, 나를 두고 다들 제 삶을 살러 나가 버리다니. 징징 거릴 수 있는 남편에게는 불평을 하고, 하교한 아이들을 따라붙어서 할 일을 찾아 대는 월요일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나 자신과 맞닥드렸다. 내가 나도 신나게 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본디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고,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말이 통하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다. 난 나랑 친한 편이다. 즐겨야겠다. 나하고만 있는 이 상황을 기꺼이 즐겨야겠다.
브런치를 거의 매일 쓰다시피 달려 나가던 작년 가을이 생각났다. 살풀이하듯이 울며 글을 쓰기도 하고, 꽃다발처럼 화사한 내 글을 거듭 읽으며 나르시시즘에 풍덩 빠져 헤엄쳐 보기도 했다. 계속 쓰다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지난 시간들이 정리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힘이다. 글쓰기가 영혼의 어린아이를 불러 냈다. 오늘도 이렇게 키보드 앞에 앉아있다.
외톨이가 되면 항상 글을 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없다는 것은 나와 있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전학을 가면, 적응이 늘 쉽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면 혼자 있게 되고 그러면 글을 썼다.
회사에서 떠밀리다시피 지방으로 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연고 없는 대구로 전학 간 초 5의 어린 호박씨가 한 일은 꽃동네에 천 원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내 돈도 아니었지만, 기부자를 위한 꽃동네 잡지가 우편함에 도착하면 뿌듯했다. 잡지의 맨뒤 구독자의 편지란에 글을 써서 보냈고, 편지는 잡지에 실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내 글이 바스락 거리는 종이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내 영혼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글의 형태로 나를 바라보는 듯한 진기하고 낯선 체험이었다.
대학교 3학년, 뉴욕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도전하지 않은 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게 되었다. 나를 아는 그 누구도 나의 뉴욕행을 원하지 않았다. 행위가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구의 응원도 받지 못한다 여겼다. 그러자, 글을 쓸 일이 생겼다. 내일 신문 기자를 신청했고, 대학생 기자로 선정되어 신문에 실릴 글을 썼다. 기자 활동 기간 1년 동안 서너 번 신문에 실렸고, 벌거벗은 영혼의 사진 같은 나의 글이 박힌 공짜 신문이 강의동 앞에 놓여있는 손발이 오글거리면서도 설레는 경험을 했다. 내겐 우울증이 왔고, 휴학을 했다.
나라를 옮긴 주재 5년 동안 글을 쓸 시간은 단 한 톨도 갖지 못했다. 글쓰기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된 글을 읽는 것이 비싸게 취급되는 곳이 유럽이다. 한국 책은 대륙 건너에선 사치나 다름없다. 먹을 수도 없거니와 무게도 나간다. 국제학교와 독일이라는 공간에서 한국어란 도시의 비둘기처럼 쓸데없는 무색무취의 존재다. 당장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쌀 한 톨인데 굶은 이에게 프랑스식 가정식이란 콧방귀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영어는 능하지 않고 독일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주재원과 그의 가족에게 한국 책이란 귀신이 나락 까먹는 소리나 다름없다.
넷플릭스 없던 시절, 교포들을 위한 불법 동영상 사이트에서 악착같이 한국어와 한국의 이야기에 매달렸던 이유는 글과 책이 없어서였다. 한국의 말과 글, 한국이라는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다. 아이들의 학교 봉사활동을 다녀오거나, 아이들의 외국인 친구 엄마를 만나고 오면 기운이 없기가 대부분이었다. 신라면을 끓여먹으면서 한국 라디오를 들으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출산을 거쳐본 이들은 알겠지만, 자궁이 수축하다가 이완이 되는 순간이 오면 행복하기 그지없다. 죽을 듯이 아프다가 그 아픔이 잠시 사라지는 순간이 오면 행복이란 이런 것이 구나 싶다. 영어라는 말 그릇은 만들어져 있는데 무엇을 담아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를 못 하는 벙어리 같은 시간이 온다.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는데, 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머릿속에서 말들을 솎아내자면, 머리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난다. 적절한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말에는 내겐 훌륭하게 느껴지는 내 인격을 잘 담아낼 수 있다. 물론 한국말도 늘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패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나에게 영어를 건네는 이에게도 멋진 내 영혼을 담아내고 싶은데, 실패할까 전전긍긍한다. 이러니, 한국말과 한국 글이 그리울 수밖에 없다.
나에겐 넘치고도 남는 시간이 주어졌다. 매일 같이 장을 봐야 하는 독일이 아니다. 지난주 15년 만에 새로 장만한 엘*냉장고는 독일 재벌 집에나 있을 법한 650리터짜리다. 이 정도 사이즈의 냉장고가 하나만 더 있다면, 독일 사회에서는 갑부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학원 셔틀버스가 없어서 아이를 이 학원, 저 시설로 싣고 날라야 하는 국제학교가 아니다. 아이의 친구가 될 만한 이를 물색해 플레이 데이트를 성사시킴으로써 원활한 교우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만큼 아이가 어리지 않다. 아이는 아이끼리 놀고, 엄마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만 만나는 공교육의 천국, 한국이다.
천국에서 지옥을 생각하고, 지옥을 그리워하는 꼴이라니. 자궁 수축이 사라지는 순간, 고통이 없어지는 시작선에서 나는 두렵다. 고통이 오지 않을까 봐 무서워한다. 고통이 없다면 행복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 중에서 불행은 무엇인가를 솎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읽는 당신도 그렇지 않으신지 곰곰이 생각해보시라. 호박씨의 말이 영 헛소리는 아닐 수도 있다. 순도 100%의 헛소리는 아니기에 내일도 글을 써댈 예정이긴 하다.
대문 그림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A lady writing, 16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