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아무도 엄마가 지하철 탄 줄 모를걸?"
그렇다. 그 누구도 나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
4호선을 타고 가다 공황 발작이 났으니까 4호선만 안 타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잔꾀가 어제부터 떠올랐다. 옳거니! 집에서 5분 거리의 9호선 사평역 지하철을 타보면 어떨까 싶다.
'해볼 만한 시도일 수도 있잖아. '나에게 사득 거려 보았다. 한 정거장만 타고 갔다가 걸어 돌아오는 거다. 성공하면 그다음에는 두 정거장 타고 가보고, 그것까지 성공하면 4호선도 타보는 거다. 갤러리 가서 그림을 보는 짜릿함과 성인 미술 수업을 들으러 가지 못해 줌으로 하고 있는 답답함의 해소, 게다가 공황의 정도는 심하지 않다는 인증까지 1타 3피의 아이디어다.
'난 진짜 천재인가 봐.' 잠들기가 힘든 매일의 연속이다. '그럼 자지 말자.' 싶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에디슨의 전구처럼 머릿속에 환하게 밝힌 생각이었다.
남편은 출근하고, 얘들도 나가고 잠바를 챙겨 입는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에 핸드폰 배터리가 빵빵한지 확인해본다.
2015년 봄, 호박씨의 애마인 중고 A3 사이드 미러 한쪽을 해 먹고 나자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 ( 호박씨에게 생긴 차 사고 에피소드: https://brunch.co.kr/@a88fe3488970423/142) 3개월 만에 말짱해진 검은 아우디를 바라보니 용기라는 것이 솟았다. 다시 사고를 쳐도, 수리 맡기는 과정을 한 번 마스터했으니 괜찮을 것만 같다.
오버 오젤 끝자락에 있는 Penny라는 슈퍼마켓에 가보고 싶었다.
매주 수요일이면 지역신문과 함께 각종 슈퍼 전단지 20여 장이 조악한 비닐에 쌓여 우편함에 꽂혀있다. 지금 핸드폰에 수시로 뜨는 앱 푸시의 일주일치라고 보면 되겠다. 수요일이 되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단지에 줄을 긋는다. 진지하고 경건하게 독일인과 호박씨가 평등해지는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전단지에 쓰인 세일 상품의 기한을 확인하고, 기한 내에 슈퍼에 가면 그 물건이 있다.
독일은 약속을 잘 지킨다. 다른 건 몰라도 전단에 있는 물건만큼은 재고를 채워둔다. 걸어서든, U-Bahn 기차를 타든, 자차로 가든 슈퍼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독일인도 나도 세일 상품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나라 국민과 동일한 눈높이가 되어 볼 수 있는 작고도 큰 기회가 매주 수요일 선물처럼 도착했다.
페니 슈퍼에 가고 싶은 이유는 Elizabeth Arden향수였다. 초등 6학년 딸이 들으면 호박씨의 취향이 올드하다고 엄지 손가락을 내릴 테지만, 호박씨가 딸만할 때 외국 패션 잡지에서 처음 접한 향수는 Sunflower, Green Tea의 광고지에 붙어있는 작은 샘플이었다. 비닐을 들추면 미국의 세련된 향이 황홀하지만, 희미하게 났다. 샘플이니 여럿이 들춘 탓에 강한 향은 아니었음에도 코를 타고 들어오는 자극에 뉴욕에 다녀오는 1초를 맛볼 수 있었다.
백화점에 가야 살 수 있었던 향수를 단돈 5유로, 우리 돈 7000원에 슈퍼에서 판다니 기필코 페니에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물론, 호박씨는 이제 몇 번의 클릭과 간단한 터치에 살 수 있는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티에 애정이 없다.
누가 같이 가주면 좋겠는데, 운전이 겁나서 슈퍼를 같이 가자는 말을 건넬 수 있을 만큼 편한 이가 없었다. 하교한 얘들을 데리고 가면 더 정신이 없었다. 아침이 되면 오늘은 페니에 갈 거라고 마음먹었다가 정오가 되면, 내일 가면 되지 하고 미뤘다.
그러다 전단지의 마지막 기한인 날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사이드 미러 사고 이후 무서울 것이 없다지만, 사실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 판명되었다. 페니 행을 두렵게 만드는 이유는 다름 아닌 철길이었다. 페니로 가려면 오버 오젤 HaupBahnhof 중앙 역을 지나야 하는데, 중앙 역을 가로지르는 철길 건널목에는 신호등과 차단기가 있다.
그렇다. 영화에서나 보는, 꿈에서나 나오는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가능한 예스러운 공간이다.
건널목의 시속 제한은 오버오젤 다운 타운 평균 시속과 동일한 30 Km/h이다. 천천히 앞차 뒤를 따르다 신호등에 주황색으로 바뀌고, 기차가 지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면 아마 비지땀을 흘리면서 바짝 앞차에 붙어 건널목을 건너가야 할 테다.
오버 오젤 중앙역까지 걸리는 10분 동안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내차는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차단기들 사이인 철길 위에서 엔진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다. 혹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차를 포기하고 잽싸게 내리면 된다. 안전벨트를 좀 느슨하게 메 본다. 탈출이 용이해야 하니 그럴 필요도 있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돌리다 보니, 어느덧 기차가 보인다. 내가 철길을 건널 때는 기차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기차는 중앙역에 도착해 있고, 신호등은 초록색이다.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이다. 목숨을 걸고 앞차 뒤를 따라가며 타이어로 밟는 매끄럽고 두툼한 열차 선로를 느낀다. 페니가 보인다. 살았다.
그 누구도 호박씨가 목숨 걸고 향수를 사러 갔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차단기와 건널목이 무서워 열흘을 망설였다는 것도 세상은 알지 못했을 터이다. 의기양양하게 페니 주차장에 A3를 주차하고 카트를 뽑을 때에 혼자 한국어로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 챔피언, 인생 즐기는 네가!" 라며 싸이 춤을 추고 싶었다. 천 번 만 번 스스로가 대견해 내게 주는 선물이라며 용량도 큰 그린티를 두 개나 샀더랬다.
춤을 췄던들, 노래를 불렀던 들, 그 누가 관심이나 있었겠으며 누군들 뭐라 했겠는가?
지하철이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크게 호흡을 하고 지하철 안으로 발을 디뎌 본다. 9호선은 급행열차가 운행하는 노선이다. 사평역은 급행열차가 지나가지 않는 일반역인 탓에 열차 시간 간격이 길다. 오전 10시면 지하철 역에 사람이 거의 없지만, 열차는 운행 간격이 긴 탓에, 때론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야 하기에 출입문을 열고 승객을 기다려준다.
얼른 출발했으면 숨을 참고 한 정거장이라도 갔을는지 모르겠지만, 열린 문을 보니 한 정거장 타기 싫다고 마음이 소리를 내질렀다. 들어주자 싶다. 도로 내렸다.
오늘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뭐 어때? 오늘 안 타면 뭐 어떠랴?
두근거리며 들어왔던 개찰구를 유유히 빠져나와 적당히 따뜻한 5월의 햇살을 즐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스스로에겐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하교한 아이들에게 오늘의 모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아무도 엄마가 지하철 탈 줄도 모를걸? "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아들과 딸 덕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 내일 또 지하철 역에 걸어가서 탔다가 내려 보려고 해. 운동했다 치려고."
" 응. 엄마. 우린 게임하러 간다."
각자의 방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응원을 받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응원, 그 무엇도 괜찮다는 응원이다. 공황장애를 앓는 엄마가 1년을 지하철역에서 망설인다고 해도 괜찮다고 해줄 아이들이다.
독일에서 아우토반도 달려봤던 여자가 한 정거장을 못 가는 게, 지하철을 못 타는 게 말이 되냐며 나무라던 것은 나 자신뿐이었나 보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진다면, 이 병도 걷힐 것이라 믿는다. 남은 삶 중에 다시 독일로 날아가 내 손으로 운전을 해서 페니 슈퍼마켓에 가고 그린티 향수 두 개를 살 날이 오리라 꿈꿔본다. 2022년 5월 호박씨의 봄 한가운데 꾸는 낮 꿈이다.
대문 그림
Vincent Van Gogh, Sunflower, 1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