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니 취급을 받아본 적은 없다. 그것은 순전히 독일에서 아시안 여자가 내니를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독일 국제 학교에서 내니는 흔히 터키나 동유럽인이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분들이 필리핀 인이기보다는, 비슷한 식생활을 가지며 정서가 비슷한 조선족을 쓰는 이유는 이심전심 말을 넘어서 서로 통하는 확률이 높기 기 때문이다. 생김과 식생활이 전혀 다른 이와 함께 생활하기란 서로 소모되는 것이 엄청나기에 유럽엔 아시안 보모를 만나기 쉽지 않다.
프랑크푸르트 국제학교에서 보모로 오해받지 않은 것은 그런 덕이다. 베트남으로 주재 발령이 난 대학 동기는 베트남의 영국계 국제학교에 아이들이 등교한다. 친구의 차를 몰고 국제학교를 가면, 내니 취급을 받거나 베트남 재벌들의 내니 보다 저렴한 차를 몰고 다니는 상황이 발생하나 보다. 자조 섞인 말을 하는 친구를 위로해주었다.
R의 내니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여름휴가로 두브로브니크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까지 야심 차게 차를 몰고 가겠다고 했더니 내니의 얼굴빛이 환해졌었다. 플리트비체는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는 곳이라며, 어느 계절에 가도 훌륭하지만 여름보다는 가을에 가야 한다 했다. 보모로 일하는 사람에게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철철 넘침을 느끼는 순간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잘 사는 나라, 독일에서 잘 사는 미국인 국민을 돌보면서 크로아티아를 사랑하는 그녀. R의 내니를 R의 할머니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마음을 담아 육아를 하는 그녀의 성품이 그녀의 행동에서 묻어났기 때문이다. 몸을 사리지 않고 R과 놀아주고, 내켜서 하는 듯 당당하고 단정한 내니를 R의 할머니라 착각했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땐, 그렇게 보이기만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독일에서 아이들의 플레이 데이트나 픽업 관련해서 엄마가 처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나는 외국인들이 외국인 내니인 경우가 많다 보니 나란 인간은 보모 급인가 아닌가 , 맞나 틀리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R의 오빠 N의 생일 파티였다. 지난 이야기에서도 말했듯, 전용 수영장과 차고도 있는 괜찮은 저택이고, 마침 N의 생일은 여름방학 한 중간이다. 아들을 비롯한 여러 국제학교 아이들이 초대되었다. N은 아들과 국제학교 들어온 시기도 비슷해 알게 된 독일 아이들도 꽤 되었다.
남편이 아들을 파티에 내려주고 오면서 씩씩 거렸다.
" 친한 거 맞아? 노란 머리 얘들 엄마하고만 인사하고, 나는 씹던데?"
" 아... 음..... 뭐.... 그랬어?"
전부터 스멀스멀 느끼고 있었지만, 남편한테도 대 놓고 그랬구나.
R 엄마가 대놓고는 아니지만 틈만 나면 학교 앞에 사는 나에게 N과 R의 픽업을 부탁해서 기분 나빠하던 차라, 생일 파티에 아이를 데려다주는 것도 남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R 엄마가 나를 보모 취급한다고 플레이 데이트를 안 보내기엔 얘들은 어울려서 잘 노는 데다가, 내가 대화를 나누는 R의 내니도 사람이 좋아 그럭저럭 이어가고 있던 인연이었다.
" 그래도 여보, 아이 픽업은 가줄 거지?"
마지못해 남편이 끄덕거렸다.
미국인들은 생일파티가 끝나면, 상대가 준 생일 선물에 대한 감사인사와 파티 사진을 Whats app으로 보내는 것이 의례다.
R의 엄마도 파티가 끝나자 1시간 정도 후에 아들이 챙겨간 선물이 고맙다며 아이들의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 그런데, 혹시 다음 주에 우리 아들 픽업 좀 가능하겠어?"
그녀가 보낸 텍스트는 전과 다름없었는데, 문제는 사진이었다.
사진에 가운데에 가장 잘 보이는 아이는 N과 대만인 W였다. N과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의 주인공은 우리 아들이 아닌, 다른, 어떤 아시안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모른다. N과 아들이 같은 학교에 다닌 지가 3년째이고, 플레이 데이트 횟수는 10회가 넘으며, N과 R을 픽업하여 우리 집에 델리고 온 횟수도 10여 차례였는데 말이다.
어떤 답장도 할 수 없어, 그날 그녀의 텍스트는 씹어야 했다.
호박씨가 내니 취급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아이가 얼굴 없는 동양인이 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호박씨가 이름 없는 아는 학부모로 여겨지는 것은 괜찮지만, 아이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제아무리 일론 머스크 뺨치는 미국인 재벌이라고 한들 말이다. 국제학교 살이란 회사의 학비 지원으로 가능했던 공짜였는데, 곰곰이 살피면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날이었다.
아들 친구의 얼굴은 몰라도 괜찮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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