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의 여름 방학은 두 달을 꼬박 채운다. 6월 말이 되면 국제학교가 위치한 오버오젤의 끝자락이 조용해진다. 돈 많은 독일 재벌집 아이들은 두바이나 미국으로 방학 시작과 동시에 독일을 떠난다. 한국인 주재원들 중에서 학령기의 아이들은 한국 가서 학원 가야 하니, 방학의 시작과 함께 강남 학원을 등록하러 부랴부랴 한국행을 한다.
가성 떨어지는 한국행 대신에 천국 같은 날씨를 자랑하는 독일의 여름을 즐기자며 남은 오버오젤, 독일 시골의 여름은 심심하고 외롭다. M과 S가 있어서 좋았다. S는 독일 현지 학교를 다녔는데, 국제 학교보다 2주 정도 늦게 방학을 시작했다. 잡화점을 지키는 M과 구매대행업이 추락 국면이라 휴가는커녕 주말에 쉬는 날도 내기 힘든 M의 남편이었다. M에게 전화를 해서 S를 우리 집에 내려다 주라고 했다.
딸과 동갑인 S가 있고, 여동생들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첫째가 있으니, S가 오면 얘들과 놀아주고 집도 떠들썩 하니 좋다.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거실 한편에서 유튜브를 볼 여유도 생겼다. 세 아이들 밥을 챙겨주거나, 한식당의 10유로짜리 Mittag 그날의 점심 메뉴를 먹으러 가면 되었다.
S가 와서 우리 얘들과 어울려 주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었는데, 일이 바빠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M은 죄책감에 S를 데리러 올 때마다 잡화점의 값비싼 독일 주방 용품이나, 이탈리아산 접시 등을 들고 왔다. 재고로 쌓인 거라 어차피 팔지 못한다고 했지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에게 S가 필요했었는데, M은 거듭 말해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자기 아이도 건사할 수 없을 만큼 일을 벌여둔 남편과 살 되지 않는 사업을 욕하기만 했다.
셋을 데리고 인근 한식당 하이데쿠로 향했다. 비슷한 메뉴인데 점심 메뉴는 한 번에 만원 정도로 저렴하다. 아이들 셋이면 점심 메뉴 세 개를 시키면 남기지 않고 먹을 수 있어서 좋다. 배불리 먹이고 나면 하이데쿠 후문 숲 쪽으로 산책 가면 된다. 숲 앞에는 나무 놀이터가 있어서 점심 잘 먹은 아이들을 놀릴 수 있을만큼 쾌적하고 너른 공간이다. 놀이터 의자에 앉아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 멍 때리기도 상쾌한 여름 향기 가득한 곳이였다. 숲으로 가는 것은 루틴이라 셋이서 조르르 숲 방향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흐뭇하게 따라갔다.
아이들 몸집보다 더 큰 누런 개가 아이들 앞을 가로막았다. 오른쪽 수풀 쪽에 낡은 차가 한대 주차되어있었고,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 주인의 개인가 보다. 주인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는 의지로 꽉 찬 집시 개는 아이들을 향해 몸을 바짝 세우고, 낮고 크게 짖었다.
아이들에게 소리 질렀다.
" 가만있어."
급하게 아이들에게 말했지만, 내 말이 아녔어도 아이들이 겁에 질려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크로스로 맨 가방을 움켜쥐었다. 잰걸음으로 아이들 옆에 바짝 서서 가방만 움켜쥐고 개를 주시했다. 여차하면 가방으로 개를 후려쳐야겠다 싶어 가방 핸들을 더 꽉 잡았다.
" 휘익."
수풀 속에서 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잽싸게 수풀 쪽 보이지 않는 주인을 향해 달려갔다. 개가 사라진 덤불을 바라보며 한참 서있었다. 다행이다.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숲 속 나무 놀이터로 향했다. 식당 주차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놀이터에서 놀고 나서도 개가 길목을 지키고 있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른 일은 다 해도 남의 얘는 보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만큼 육아도 돌봄도 무겁고 버거운 일이었다. 내 아이의 일이건 남의 아이의 일이건 완벽해야 하는데, 돌봄이란 것이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완벽과는 천지차이가 나는 일이라, 혼돈스럽고, 질서를 파악할 수 없는 일이다.
방학만 시작하면 S를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했던 일들을 후회하는 순간이 개의 눈을 직시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보다 더 큰 개가 포효하는 순간, 내 아이들의 안전보다는 S가 물리면 어쩌나 하는 찰나가 있었다.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이튿날, 아이를 데리러 온 M에게 개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S가 엄마에게 실토할지언정 내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겠라. 그리고 S를 우리 집에 데려다 놓으란 말도 줄게 되었다. 남의 아이 보는 일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가 자라난 그림 형제의 독일 전래 동화 속에는 새엄마가 나온다. 남의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것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동화 속 못된 새엄마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 그 무게는 감당해본 사람만이 알기 때문이다. 잘 돌본다는 것, 마음을 다한다는 것, 어려운 일이다. 적당히가 안되는 호박씨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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