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첫사랑, 첫눈. 처음이란 단어가 붙으면 설레어지곤 한다. 첫 독일 여행날은 오늘 같은 날씨였다. 독일의 양평, 독일의 두물머리. 바로 Koblenz다. 글을 쓰는 호박씨는 이름에서도 조형미를 느낀다. 코블렌츠는 여러 번 되뇌어 말해도 명랑한 울림이 있는 단어다.
유럽 여행으로 즐기는 관광지에서 독일은 빠지게 마련이다. 맹숭맹숭 별 맛없는 김 빠진 탄산수 같은 독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날씨 좋고, 먹거리 많은 스페인. 명품의 프랑스. 음악과 미술의 오스트리아. 런던이야 해리포터와 뮤지컬이라는 대중문화의 성지다. 독일. 독일이라 하면 라인 뭐이 그리 정히 봐야 하는 것이 있겠는가? 독일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던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유럽의 문이고 허브지, 명소는 아닌 바이다.
그런데 오늘의 호박씨는 독일의 도시들을 떠올린다. 파도에 깎여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사이다 조각들을 해변에서 주으며 보석보다 어여쁘다 여긴다. 여전히 사이다 병인 줄은 알 수 있을 정도의 각도는 유지하고 있지만, 손에 쥐면 부드럽기 그지없는 촉감의 유리. 바닷가에 늘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발견한 아이에겐 다이아몬드보다도 좋아 보이는 것들. 독일 도시들 같다.
주변 주재원들 누구도, 독일 내의 도시들은 그다지 흥미가 없다. 회사 사장이 된 듯 전속력으로 일에 빠져드는 남편을 둔 덕에 독일 밖 유명 도시들을 갈만한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일요일 반나절 정도가 그에게 허락된 시간인지라, 고속도로로 2시간 이내의 도시들을 정복해볼 요량으로 서핑을 시작했다. 알게 된 두유 트래블 독일 사이트. 이 분이 없었다면, 나의 독일 여행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테다.
도시별로 나온 리스트를 죽 훑어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주말 일정을 찍었다. 후보지에 오른 것이 코블렌츠, 트리어, 아헨. 이유는 간단했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소리 내어 읽어 예쁜 이름의 도시로 가보자 였다. 1위로 선발된 코블렌츠로 출발하는 주말이었다. 일에 치여 너덜너덜한 남편에게 겨우 시간을 낸 반나절이었는데, 추적추적 늦겨울비가 왔다. 내리다 말다 했지만, 일단은 고다.
내비게이션에 코블렌츠 관광 안내소를 찍고 출발했다. 일요일은 관광안내소도 안 하는 독일. 관광안내인도 워 발란스를 맞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2015년 관광객 버전이었던 호박씨로써는 도저히 이해불가다. 장사 안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관광으로 돈 벌 생각 없는 독일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관광안내소 인근 시내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었더니, 주차료가 발생한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주말 텅 빈 주차장 주차요금 계산기에 동전을 넣어야 한다. 기가 막히지만, 이 또한 독일이려니.
도이쳐스 에케, 독일의 모서리라는 뜻이다. 독일의 두물머리까지는 금방이었다. 케이블카로, 독일을 통일한 카이저 빌헬름,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빌헬름 황제의 상을 지나 요새로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에도 역시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 사이로 두 강이 보인다. 모젤강과 라인강.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정취이고, 한국에서는 즐기기 쉽지 않은 풍경이다. 서울살이에 사람 한 명 없이, 교통 지옥 없이 양평에 도착하기 어려우며, 줄 서지 않고 케이블카 타기란 쉽지 않다. 늘 독일은 사람이 귀하고, 땅이 넓으며 한적하고 쾌적했다. 코블렌츠를 시작으로 내내 그렇하였다. 한결같이 독일의 도시들은 그러하다.(아, 베를린만 빼고다.)
요새에도 사람이 없다. 아이들과 우리 것인 양 요새 안의 작은 박물관을 구경하다 발견한 1900년대의 독일 군복과 군인의 모형이 눈에 띄었다. 2015년 내가 마주치는 독일인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잘난 체하는 거구 들인 것만 같은데, 1900년 1차 대전의 독일인들은 왜소하고 가난하다. 직업 군인은 더욱 그러하다. 낡은 붉은색 제복을 입은 흑백 사진 속 독일 남성은 구한말 우리네 사진과 흡사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날 많은 것이 뇌리에 남았다. 독일도 내 나라보다 조금 더 먼저 발전했을 뿐이니 정겹게 여기자 싶었다. 쾌적하고 한적한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싶기도 했다. 오늘처럼 서울에서 독일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감했다. 비가 추적이 내리는 양평을 어느 주말에 들리게 된다면, 코블렌츠를 한도 없이 그리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