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제 국제학교는 초등 6학년이 되면 Upper스쿨, 더 높은 학교 소속이다. 독일은 초등 5학년에 인문계와 비인문계로 진로를 정하는데 비하면 1년 늦는 셈이다.
독일이 얼마나 구성진 나라인지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초등 5학년이면 부모가 아이가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니 아이의 진로 계획서는 사실 부모의 향후 양육 설계도와 같은 셈이다. 모두 다 인 서울 또는 스카이나 의치대로 달려가는 희망고문 따윈 없다. 일찍이 자녀를 즉시 하는 것, 부모과 자녀 모두 정신이 건강해지는 길이다.
독일 현지 학교는 한 번도 보내보지 않은 주재원 학부모가 독일 학제를 어찌 아는가 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어디서든 경계선을 밟고 가길 좋아하는 호박씨라, 플랜 B를 간직하고 살아나가야 하루가 안심이 되던 외국인이었기에 독일 현지인의 삶이 궁금했다. 마음을 나눈 이들의 자녀 대부분이 독일 공립학교를 다닌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J의 엄마 T는 태국인이었다. 큰 아이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시절에는 아는 척도 안 하던 T는 아이가 학교에 더듬더듬 적응하자 나와 인사를 나누고 말도 건넸다. 열대 나라 사람 특유의 태양 같은 에너지가 있어서 흐린 독일 국제 학교의 놀이터에 그녀가 나타나면 시선이 끌렸다. 몸이 재고 행동이 시원시원하고 발이 빨랐다.
주말 토요 스포츠는 아시안 엄마들에겐 수다의 장이다. 주축을 이루는 미국 아빠들은 얘들 코치와 보조 코치하기 바쁘다. 부끄럼 타거나 주말에도 영어 하기 싫고 자녀와의 시간이 어색한 아시안 아빠들은 토요 스포츠는 얼씬하지 않는다.
운동장 멀리 아이들이 보이고 관람석에서 한가롭게 독일 가을을 즐기던 날이었다. T가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꺼냈다. 아시안들은 워커홀릭이며 일에 미쳤다 했다. 그녀가 만난 동북아시아인들은 그만 열심히 살라한다. 맞는 말이다.
태국을 셀프디스 하기 시작했다. 빈부격차가 큰 태국에서 부자의 삶이란 땅을 밟지 않는 fake 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기사가 학교에 등하교를 시켜주며 대학은 미국이나 영국 학교를 가고 평생 걸을 일 일을 사는 삶은 가짜라고 말한다.
글쎄.... 국제학교 운동장 관람석에서 사립학교를 큰 목소리로 까는 T는 역시 더운 나라 사람이구나 싶다.
며칠 전 노르웨이인인 T의 남편을 학교 놀이터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북한을 들렀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북경도 워낙 자주 가는 바라 아시아는 빠삭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맞장구를 연신 쳐주니 기분이 좋았었던 걸까?
"한국사람 치고는 영어 발음이 좋은 편이네."
노르웨이인에게 영어 칭찬을 받고 한국인의 영어 디스를 받고 나니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 얼떨떨하다.
그가 만난 아시아인들의 영어 실력을 평가하고 평균을 내서 그 평균보다 더 많은 점수를 받았으니 기뻐해야 하는 걸까?
T의 딸이 5학년이 되자 현지 학교로 두 아이를 다 옮겼다. 부촌인 Bad Homburg에 집도 있고 태국 친정서 국제학교만 다닐 정도로 넉넉한 그녀가 아이들을 전액 공짜인 독일 공립학교로 옮긴 것은 돈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짐작했다.
두 아이들을 독일 공립학교로 전학시키고 T의 동네 밧홈북 최대 페스티벌인 사과 축제가 열렸다. T는 단톡방을 열어, 국제학교에서 친했던 아시안 엄마들, 나, 대만인 Mandy와 베트남계 미국인 Trang을 초대했다. 그녀의 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애플 페스티벌로 가는 일정을 짰다.
간단히 준비한다더니 T는 작정하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뒀다. 단단히 마음 먹은 듯 몇 시간에 걸쳐 독일 공립학교 자랑이 늘어졌다. 엄마들이 자원봉사하는 급식 메뉴와 배식에 참여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자녀가 한 달여 동안 누린 모든 공짜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참고로 호박씨는 3년 후면 한국으로 복귀, Mandy와 Trang은 국제학교를 언제 떠날지 기약이 없었다. 자녀들을 계속 국제 학교에 남겨둘 예정인 그 둘을 데려다 놓고 공립학교 자랑이 늘어지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유교 문화권의 두 사람이다. 대만인 Mandy도 베트남계인 Trang도 잠자코 T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T는 조용한 그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준다 여겼나 보다. 국제학교에서 T가 만났던, 그리고 여전히도 우리와 함께 국제학교에 있는 미국인 학부모들을 한 명씩 까기 시작했다. 우린 당장 내일이라도 그들과 아침인사를 나눌 예정이다. 내일도 우리 셋의 아이들은 국제학교로 등교할 것이다.
국제학교에서는 일생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법한 국가에서 온 인연들을 만난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 방법은 공통적이다 못해 비슷한 양상을 띠어간다. 그래서 이민도 가고, 국적도 바꾸고 하나보다 싶다.
독일을 사랑하고, 유럽에 자부심을 느끼는 T부부는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멋들어진 가족사진을 보내며 Season's greeting으로 연락을 해온다. 독일에서의 삶과 유럽인으로써의 삶을 멋들어지게 사는 그들을 부러워할 법도 한데, T 가족만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디스로부터 오는 만족은 불완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 아니라서 저것이다라는 마음 가짐, 살아보니 꼭 그것이 정답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