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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an 02. 2023

청계산의 아침이란 깨달음

6시 알람은 마음도 모르고 속절없이 울린다. 일어나기 싫다. 여왕의 오후 파티시에인 동생에게 7시에 청계산 입구역에서 만나자며 큰 소리를 쳤던 것이 겨우 12시간 전이였다.

12시간 사이에  ' 여왕의 오후는 너에게 무슨 의미야?' , ' 얘들은 저 모양으로 내팽개쳐두고 너만 병 나으면 다야?' 소리를 들었다. 어김없이 위장이 타들어가는 듯한 뜨끈함을 느끼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휘청거리고 메슥거리는 몸을 달래서 알람을 맞추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머리끝까지 푹 눌러쓰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연말 금연 한다던 남편은 속상함을 빌미로 다시 담배를 피우는지, 서너 시쯤엔 현관문 소리가 났다. 할 말 다한 것 같은 그가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나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게 마이너스의 기운을 쏟아 부운 사람은 플러스로 사기 충만해야 이치에 맞는 것일 것만 같은데.


남편은 대구에서 장례가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깨워 7시에 집을 나섰다. 아빠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엄마도 아빠 눈치 보는 것을 느끼는 아이들은 일요일 6시 30분에도 일어나고, 옷을 챙겨 입는다. 애들도 다 컸구나, 녀석들 멀쩡하군 싶다. 아빠는 왜 안 가냐고 묻지도 않고 졸졸 따라나선다. 집을 나서자마자, 배고프다고 하니 듣기 좋다. 입이 짧은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에겐 배고프단 말이 세상 달콤한 말이다.

청계산 입구역에서 만난 친정엄마는 머리 뿌리가 하얗다. 정상에 올라가서 먹자며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오셨다. 보온병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 하나뿐인 손주 좋아한다고  이고 지고 오셨다. 꼭대기 가면 라면아저씨가 있을 터인데, 무겁게.... 그래도 배낭은 절대 내어주시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오면 엄마 머리 염색부터 해줘야지 싶다. 보온병을 지고 아이들을 안아주는 엄마의 뒷모습이 새해 아침에 마주하는 풍경이다. 뭘 하고 살은 걸까? 후회가 밀려온다.


동생은 구두를 신고 왔다. 푸흡. 청계산은 꽁꽁 얼었다. 해맞이 인파가 맞아 살얼음으로 덮인 바위도 많다. 올라갈 때는 날다람쥐처럼 쓱쓱 올라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2023년엔 여왕의 오후가 대박 나겠구나 싶었다. 내려오는 그녀는 한 발 한 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손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그녀의 구두 앞에 씌워 주웠다. 오리발 모양이 되긴 했지만, 내려오는 속도는 높일 수 있었다.


할머니 등의 보온병이 무거우니 뱃속으로 물을 옮기자 하니 아이들이 신났다. 꿀맛이겠다 싶다. 옥녀봉 꼭대기와 해뜨기 구경하기는 커녕, 첫 번째 쉼터에서 라면을 때렸으며 청계산 입구역에서 부터 날은 밝았다. 그럼에도 신난다. 라면은 너무 맛있고, 산은 적당히 오르기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 내년에는 6시에 만나서 꼭대기 까지 올라가자. 해 뜨는 거 봐야지."

'아니, 엄마. 해 뜨는 것 보지 못해도 꼭대기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모여 라면을 나눠 먹을 수 있는 2024년이면 행복할 것이야. '

입으로는 " 응, 내년은 6시."라고 했지만, 엄마의 흰머리 뿌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해 뜨는 것 안 봐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 지금 출발한다고."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 그는 정말 여왕의 오후의 의미가 궁금할 것일까?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울고 웃고, 월급 더 받아오라고 바가지 긁던 배우자가 선선히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감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오를 것 같다. 그 길로 떠날까 두렵기도 하고, 외로워질까 걱정도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의 허전함을 채워줄지 그리고 그의 불안감을 안아줄지 고민해 봐야겠다. 2023년도 바쁘겠다. 1월 1일부터 숙제가 주어졌으니까.

하루종일 어지러운 하루다. 감기가 왔나 보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어지러우면 공황장애구나 싶어서 눈물부터 나고, 어찌 살아야 하나 걱정이 덮쳐왔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출근을 하면서 씩씩해졌다. 찾아온 병 또한 안고 나아가야지 하는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붙기 시작하더니 2023년 1월 2일 오늘에는 어지러움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대수롭지 않다기 보단,  이 또한 '나'이구나 싶다. 감기가 오면 제일 약한 부분에서 터진다. 나는 신경이 약한 사람이다.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호박씨가 되었다. 더 살아야겠다. 재밌게 하루하루 더 살고 싶어 진다.


얼어붙은 산을 오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쉽게 오른 산을 내려오려니 무섭기만 하다. 엉덩방아 찧기 싫고 미끄러지긴 더 싫었다. 하나, 내려오고 나면 개운함이 나를 반긴다. 해냈구나 싶어 스스로가 기특해진다. 꼭대기까지 가지 않은들 무슨 상관인가? 내가 도착한 곳까지가 나만의 목표점이라 둘러대면 된다. 뭐 어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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