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입니다.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검증된 약을 처방해드릴께요."
왜 몰랐을까? 아이의 대답은 1년 동안 한결 같았다.
" 싫어. "
나가기 싫어했다. 사람 만나기 싫어했다.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아했다. 아이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단 한가지 온라인 게임과 유튜브시청이였다. 온라인 게임도 유일하게 아이가 함께 하는 이는 국제학교에서의 인연인 캐나다아이 뿐다. 아이와 즐거움을 함께 하고 소통하는 이는 아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었다.
버거웠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시간에게 짐을 떠 넘겼다. 의지할 데 없이 오로지 내 문제다라고 생각하니 외로웠다. 엄마지만 사람이고, 부모지만 혼자이고 싶진 않으니까.
토요일마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겼다. 학원 다녀 오면 아이랑 산책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남편은 한번도 옳게 지켜주질 않았다. 그도 아이를 직면하긴 힘든 것일까?
학교 앞에서 만나 아무 말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여름 뙤약볕에 혼자 걸어가던 삼성전자 앞 길이 왜이리 쓸쓸한지. 병원 가는 길은 언제나 싫지만, 오늘은 더 싫다.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 아니다. 거듭 거듭 되내여 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내 딛을 수 없다. 모자를 푹 눌러쓴 아이가 눈치를 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해외생활을 해서, 코로나라서, 엄마가 우울증이라서 그 무엇의 단순한 원인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예약 없이 간 병원에는 아이 보다 두세살 많아 보이는 청소년이 엄마와 대기하고 있었다. 아이처럼 사전 질문지에 답을 써 넣고 아이는 상담실로 들어갔다. 아이 엄마도 가방을 단단히 쥐고 가만히 대기한다.
"엄마, 나 신발 빨아야 할 것 같아."
긴 사전 질문지를 후다닥 작성하고 난 아이가 거무튀튀해진 운동화를 쳐다보며 내게 말을 건다. 사전 질문지에는 신경쇠약과 우울감에 대한 여러 질문이 쓰여있다. 아이가 1부터 3까지의 문제 정도를 표시하는 것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천장으로 고개를 젖히고 있어야했다. 목이 뻣뻣해져오고 눈이 빠질 듯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맑은 아이의 목소리에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여름 내내 두터운 잠바를 입고 다녔다 .학교 교복인 긴팔 후드를 30도가 넘는 날씨에도 입고 있었다. 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불자 모자까지 푹 눌러썼다. 옷은 갈아입지 않는지 아이 빨래는 나오지도 않았다. 왜 그 때 몰랐을까? 아이를 덮는 어두운 그림자를 느꼈다.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다.
되돌이켜보니 하나하나 이해가 되었다. 한국 학교에서 친구를 만들어보려했지만, 누구도 공감해주지 못했다고 했다. 한국 아이들과 어울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포기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름.
봄에 나를 덮친 공황장애에 여왕의 오후 창업을 하던 여름까지 아이를 느끼고는 있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아이 혼자서 어찌 어찌 해 내겠지. 내 나라가 아이를 어떻게 해주겠지. 거기를 두고 기다려주면 언젠간 아이가 고군 분투하다 나름의 해결을 보겠지 싶었다. 곪아 터진 상처는 이제야 고름이 삐져나오고 있는 것을....
" 엄마, 양파는 김치 냉장고에 넣을까?"
눈물이 흘러내린다. 일하는 엄마니까, 온라인으로 장 본 것들이 배달 오면 냉장고에 정리해서 넣으라고 잔소리를 여러번 했었다. 엄마는 일하니까, 한국 적응은 너가 혼자 알아서 해라고 했다. 훌쩍 철들어 보라고 등 떠 밀었다. 눈을 맞추고 내게 아이가 말한다. 양파는 어디다가 정리해 넣어야하냐고 묻는다. 드디어 아이가 장본 것을 정리해 넣는다고 하는데 행복하지 않을까? 아이는 더러워진 제 신발과 냉장고 정리를 말하고 눈물은 하염없이 나온다.
입술을 깨물어보았다.
울음을 눌러 겨우 입을 뗘본다.
" 엄마때문에 네가 아픈 걸까?"
" 아니, 정신적인 문제는 유전이 아니야."
힘주어 말한다. 아이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기운이 느껴진다. 세상을 향해서 나를 지켜주고 싶은 아들의 음성이 찌릿하고 와닿는다.
유전 맞어, 아이야. 아까 병원에서도 문항지에 그렇게 써 있었잖아. 유전이 아니라 하더라도 함께 사는 이의 정신적인 기운은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삶의 어둠 속을 헤매는 1년동안 내가 겪은 아픔은 이제 아이에게 옮겨 갔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했던 남편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그로써는 나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테지만, 아이의 아픔앞에서는 도망가고 싶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든 다시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주재원이 되어야겠다고 하는 그에게 말했었다. 거듭 이야기했었다. 내 나라라서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맞서도 대처해 나가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주재 생활 때문에 병이 난 것은 아니지만, 다시 해외에 나간다고 해서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도 나도 삶을 마주하고 무거워하는 것은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디에 있어도 나는 외로워했을 것이다. 이게 삶인 것을 이젠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