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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Apr 04. 2023

버블버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역시 아침이 힘들다. 얘들이 나가고 나면 텅 빈 집의 고요가 당황스럽다. 뭘 해야 하나 생각하기 싫다. 강제적으로 나를 집 밖으로 내 보낼 외력이 필요한데, 동생의 카페는 지난주부터 출근하지 않게 되었다. 머리를 짜 내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편안하겠는데..... 오늘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침 조례를 혼자 해야 한다. 회의실에 모여서 하던 아침 미팅이 생각났다. 20년 전의 일이지만 생생히 기억난다.  

 말단 직원부터 팀장 밑 과장, 대리까지 찌뿌드드한 얼굴들이었다. 오늘 하루는 무엇으로 성과를 낼 것인지 함께 모여서 계획을 짜보자고 하던 그 순간 사실 얼굴이 가장 흙빛이었던 것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중년의 팀장이었다. 그래. 역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짜내는 일이 인간에겐 가장 괴롭다. 너 이거 해, 저거 해 하고 강제적으로 미션을 줄 누군가가 있다면 축복이다. 

 게임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 유일하게 좋아하던 PC게임이 풍선 터트리기, 버블 버블이었다. 오늘 하루를 버블버블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버블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빨간 버블, 파란 버블, 색색의 풍선이 화면에 있다. 지금 당장 터뜨려야 하는 것, 또는 앞의 풍선을 해결해야 가능한 안쪽 풍선도 있다. 월요일의 시작, 아이들이 나가자마자 작성한 리스트다. 


버블버블 ( 버블버블이라 썼다.)  

빨래

화장실청소 

아들 중학교 진로 선생님 상담신청 

브런치 글쓰기

봄맞이 옷장 정리 

배추 사기 

만보 걷기


이외에도 10여 개 정도를 더 써 내렸다. 박수가 절로 나온다. 이 많은 것을 오늘 다 해낼 예정이란 말인가? 동료도 없이 혼자서? 15년 동료 없이 일들을 해내왔다. ( 남편은 본인의 업에 충실하니라 도움을 받았다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미션을 더해주지만 않으면 감사할 노릇이다. 물론 그로 써도 최선은 다했으리라.) 셀프 칭찬으로 시작하며 나를 북돋자. 작성했으니 일단 수고했다고 감사인사부터 하며 스스로를 달래 본다.

자, 당장 없애지 않으면 게임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1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풍선에도 경중이 있다. 쌓인 풍선이 밀려 밀려 바닥에 닿으면 도루묵이다. 모두 적어 두고 다시 살펴본다. 이 중 오늘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뭘까? 닥친 일이 제일 하기 싫다. 미루다 미루다 오늘까지 쌓인 일이다. 닥친 일은 우선순위가 급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아들의 학교에 연락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급하며 중요하고 가치롭지만 하기 싫고 타인, 이제 막 알게 된 낯선 이와의 소통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어느새 핸드폰을 들고 sns 창을 열고 있다. 네이버 뉴스도 본다.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게다. 아침 미팅 자리였다면 말을 돌리거나, 딴짓을 하는 셈이다. 1번! 오늘의 첫 번째 풍선은 ' 아들 학교 연락 취하기'다. 화장실 청소나 빨래부터 하면 안 될까? 미루면 되잖아. 어디선가 들리는 유혹이다. 그런데, 분명 알고 있다. 이 풍선이 그 풍선이다. 바닥에 닿이기 직전이라 터뜨려야 핮만 하는 녀석이다. 

아침 미팅으로 나와의 버블버블 사투를 벌이니 30분이 금방이다. 가치로운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일들이 나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돈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일이다. 가치를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정의 내려야 할 판이다. 환장할 노릇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것들에 의해서 살고 있는가?

돈은 중요하고, 자본주의는 옹호되었지만 돈이 전부일 수는 없으며 자본주의만으로 인간이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니까. 오늘을 조각케이크처럼 잘라 그 단면을 들여다보면, 착한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요정처럼 우린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실리는 플랫폼은 창작은 모두의 것이며 글을 누구나 쓸 수 있고, 소리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가란 아무나 될 수 있다고 부르짖는 누군가의 의지로 탄생했다.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에너지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끼니와 건강을 염려하는 친정엄마의 쉼 없는 기도로부터 기원해 왔다. 핸드폰으로 호박씨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당신의 기운 또한 당신도 모르는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부터 오롯이 존재한다. 



 신기한 날이었다. 버블버블 리스트를 작성하고 띠링하고 브런치 알람이 울렸다. 

" 조회수가 1000을 돌파했습니다."

눈을 비볐다. 뭐야? 브런치 왜 이래? 

조회수가 5000을 돌파한 것이 정오쯤이었는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일요일에 브런치에 써 올린 '스즈메의 문단속'이란 영화에 대한 브런치 글이 daum을 통해 계속 검색되고 있었다. 남편과의 불화를 벌거벗듯 써 올렸는데 남편이 daum을 사용하진 않겠지, 설마? 스멀스멀 걱정이 됐다. 

기계적으로 회사에 나가고, 일이 전부인 듯이 살아서 나와 아이들 일에는 지극히 무관심한 남편이 무능력하다 싶었다. 그런 덕에 외롭고 버거워 켜켜이 세월 속에 글꼭지 부자가 되었다. 그런 남편에게 파업 농성 중이니 제대로 글감을 잡을 수 있다. 얘들만 잘 보라고, 현모양처가 너의 일이라고 가둬두는 남편 덕에 이렇게 딴짓을 할 시간이 넘쳐났다. 저녁 8시가 되어 달성된 1만 4천 뷰는 남편의 덕이다. 

브런치 조회수가 1만 4천 뷰가 되어도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은 0원이다. 조회수 폭발하는 글이 나오기까지 브런치에 1년 6개월을 시간 속에서 내게 경제적 가치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쓸 것이냐고? 스릴 넘치는 어제를 맞이한 이로써 어깨에 힘줘가며 말해본다. 꾸준함  그리고 쌓인 시간이 주는 짜릿함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소리 높여본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목소리를 남겨야 한다. 잊히는 가치에 대해 노래해야 한다.

 나만의 버블버블을 찾았다. 내일 아침은 아이들이 나가도 걱정 없겠다.  빨래, 화장실 청소, 김치 담글 배추 사기 등등의 리스트 최상위에 있어야 할 버블은 '돈이 전부라는 생각 뽀개기'다. 당장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하여 의미 없다 여기지 말자. 나에게도 가족에게도, 이 순간 나를 둘러쌓고 있는 모두에게 지치지 않고 환기시킬 일이다. 게임을 이어가려면 풍선은 바닥에 닿이기 전에 터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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