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면도법도 영상으로 알려주는 엄마, 아니 아빠

by 호박씨

호박씨, 연애 많이 안 해봤지?

묻길래 웃었다. 가까이서 본 남성은 아버지뿐이었는데, 아버지도 서른이 넘어 아버지의 약국에 나가 도와드리기 전까지는 사실 곁에서 관찰하거나 서너 마디 이상 건네본 일이 없었다. 남자로 사는 것은 어떨까 궁금했다. 경영학 전공이라, 학부에도 여성이 10%뿐인지라 남자로 둘러싸여서 지낸 20대, 대학생이던 시절엔 연애가 끊이질 않았다. 지금이야, 안경 끼고 파마끼 없는 머리 스타일에 화장이라고는 립스틱 바르는 것이 다이지만, 당시는 어떻게 보여야 그들이 좋아할까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하며 이미지 포장을 곱게 했더랬다. 많은 연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단순함과 끈기 그리고 한국남성으로서 사는 것의 무게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아들이 생겼다. 첫 아이이니 뱃속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열 달 동안 사실은 꿈을 꾸었다. 말 그래로 꿈을 꾸는 문어였다. 꿈속에선 뭐든 할 수 있는 문어처럼 아이가 이상형으로 삼았던 여러 지적인 작가와 CEO ( 예를 들면, 7막 7장의 홍정욱 씨) 들과 비슷할 것이 상상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들을 키우는 데에는 같은 성별을 가진 아빠의 영향력이 지대할 것이라 짐작했고 이 짐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아빠로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나에게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으니, 아이에겐 멋진 아빠로서 삶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했다. 말은, 주문은 쉬운 일이다.

어떻게 해서든 아빠와 아들을 친하게 만들어야겠다는 꿍꿍이로 그들을 대했지만, 둘은 달라도 한참을 다른 존재였다. 성별만 빼면 아들은 나와 참으로 똑 닮은 성향이었다. 독박육아를 했으니 그러할 수밖에... 하나에 빠지면 뒤도 보지 않는 편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엔 소질이 전혀 없지만 손가락으로 꼼지락 거리는 것은 귀신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맛깔나게 잘 쓴다. 감수성이 풍부해 아이의 글과 그림에 녹아 있어 아들의 글과 그림은 보면 즐겁다.

아빠와 친해지라고 아빠가 좋아하는 취미인 자전거 타기를 함께 보내려면 백번을 말해야 했다. 남편은 굳이 싫다는 얘를 데려가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렸고, 부탁에 못 이겨 데리고 나가면 씩씩거리며 돌아오곤 했다. 이해할 수 없고, 정신없어 보이는 녀석의 행동을 해석해 달라며 말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가자고 하면 남편은 그러기 힘들다 했다. 딸아이에겐 이것저것 부탁하고 하소연을 하며 누나 셋을 대하듯 하면서도 아들에겐 어찌 대해야 하나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아들은 마냥 아빠가 좋은데 말이다. 아빠라는 존재 자체로 아들은 남편을 사랑한다. 나는 안다. 아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배어 나오는 아빠사랑을 말이다.



그렇던 아이가 아빠와 눈을 맞추지 못한다.

지난 명절이었다. 공황장애가 나를 덮치고, 아버님은 폐암으로 떠나셨다. 아버님이 가시는 내내 남편과 시누들은 서열 최하위를 쥐고 흔들었다. 기 제사에 부엌에서 하도 난리를 친 통에 시댁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가신 분을 기리는 마음이면 되는 것 아닐까? 이리해라 저리 해라 시아버지의 격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말로 찔러대는 통에 억울함은 하늘을 찔렀지만, 아버지 잃은 슬픔을 겪은 이에게 말할 순 없었다. 힘들다는데 누나와 엄마에 대한 불평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 원래도 가만 듣지 못했던 그니 더욱 그러하겠다 싶었다.

그러다 무서워 한마디를 했다. 출발하려던 저녁, 부엌에서 얼마나 들볶이는지 알지도 못한다 하니 혼자 가겠다며 차를 몰고 나갔다. 잘 됐다 싶었다. 1시간쯤 지나자 그는 딸얘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아파트 현관으로 짐을 싸서 내려오라고 했다. 딸얘만 갈 리가 없다. 집으로 올라와 아들 방으로 향한 남편은 아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엄마는 빼고 차로 가라고 했다. 남편이 나간 사이에 두 아이를 데리고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했두었다.

할아버지 첫제사에 엄마는 고모들과 할머니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함부로 대해서 그들을 만나기 불편하다고 말했다. 최대한 솔직하게 그들이 내게 던진 말을 아이들에게 옮겼다. 그래서일까? 남편이 부산으로 출발하자고 하니 아들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침대에 앉은 아들의 목을 잡아 끌어내렸나 보다. 큰 소리가 나 아들 방에 가보니 아들 목이 벌겋다. 서로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섰다.

" 아빠, 지금 나한테 하는 거 옳지 않아. 힘으로 끌어냈잖아. 나 신고할 거야. 엄마는 아빠를 왜 지경이 되게 내버려두었어?"

남편은 아들에게 너는 가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 제사니까 가야 해. 너 명절 때마다 고모들한테 용돈 받았잖아 가야 해. 그리고 내게 소리도 질렀다. 도대체 얘들한테 무슨 소리를 지껄였냐고, 이간질 중이냐 했다.


그래, 이간질 맞다.

기억을 더듬어 어린 시절 부모님이 싸우시면 불안함이 컸다. 세상이 두 조각으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결심했었다. 내가 엄마가 되면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고해야지. 사실대로 말하고 화해하고 해결하는 뒷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마음먹었다. 마음먹은 바를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남편이 아들에게 힘을 행사한 날이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아 더 이상 폭력은 일어나지 않게 했다. 혹 맞더라도 내가 맞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들의 눈에서 분노를 읽었고, 아빠에 대한 경멸도 말투에서 묻어났다. 맞는 것보다 그게 더 마음이 아프다. 아빠에 대한 아들의 애정이 0도 아닌 마이너스를 향해가는 순간에 나는 둘 사이에 서 있었다.




"엄마, 난 아빠가 싫어."

아빠가 말 거는 것조차 싫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빠가 거는 농담이 불편하다고 했다. 넌 어쩜 나 같니...... 잊히지 않는다. 아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은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는 언제 나을까? 아마도 그 둘이 마주 보고 남편의 진심 어린 사과가 말과 눈빛으로 꺼내질 때쯤이 아닐까 싶다. 과연 남편이 그런 용기를 낼 날이 올까 모르겠다. 15년을 살면서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것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사과를 해야 할 때, 꼭 해야 할 말을 할 때는 술을 먹고 오곤 했다. 얼렁뚱땅 쑥스러워하며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건네는 사과만큼 건방진 것이 없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동성만이 부모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홀어머니 아래서도 잘 자란 공자님도 있으니까. 남편이 아버지 하기 싫고 자신 없다면 말자 싶다. 아빠도 하지 뭐, 까짓것. 난 아빠다, 난 아빠다. 거울 보고 매일 10번씩 말해야지! 아침, 저녁으로 말이다.

그래, 난 아빠다. 밥도 잘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돈은 못 벌어오지만 그래도 경력을 만들어보려고 고군분투하는 취업준비생 아빠다. 까뭇해진 아이의 코 밑을 보며 이젠 면도 좀 해야지 않냐 했다.

" 면도는 어떻게 하는데?"

아들아, 우리에겐 유튜브가 있잖아. 면도를 시작하는 이를 위한 동영상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브런치에도 혹여 있지 않을까? 아빠 되기 식은 죽 먹기의 세상이다. 면도법에 대한 글이 곧 발행될 예정이니 기대하시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