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기억에 스승의 날 즈음은 봄날이었다. 오늘 같은 30도의 숨 막히는 여름의 숨결로 가득한 공기가 아니라, 쨍하니 좋아 누군가에게 감사를 하기도 좋은 때였는데. 오늘 독일의 낮최고 기온은 15도 내일은 20도이다. 여행을 다니기에 최고의 시즌을 향해 독일은 가고 있는 중이다. 20도가 되면 동네에 하나뿐인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연다.
엄연히 말하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젤라또 전문점이다. 우리에겐 친숙한 베스킨라빈스 3*의 시조새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물론 젤라또 하면 이탈리아다. 로마의 휴일 오드리헵번이 되고 싶다면 스페인광장에 앉아 주변 백 년 넘었다는 젤라또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된다. 유럽여행의 시그니쳐이겠다. 유럽의 많은 음식이 그러하듯 젤라또도 그 기원은 이탈리아다. 음식하면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니까.
독일에서 맛있는 것이라면, 이탈리아제다. 프랑스가 그 기원인 음식은 찾기 쉽지 않으며 프랑스 음식을 고급음식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독일은 부족한 편인데, 그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축구 경기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와 비슷하다고 여기면 된다. 그리하여 젤라또는 메디치가에서 프랑스로 시집간 왕후를 따라간 이탈리아의 닭장수 요리사에게서 기원되었고, 혁신적인 음식이었겠다.
다른 주택들도 그러하든 단층 또는 2층 짜리 건물에 레스토랑이나, 미장원 등의 가게가 위치한다. 프랑크푸르트 외곽 오버오젤에선 5층을 넘는 건물 찾기는 쉽지 않으니, 젤라또 가게도 어김없이 2층 주택이다. 나름 주상복합인 셈이다. 아마도 2층엔 젤라또 가게 주인이 살겠구나 했다. 이 주상복합 건물은 젤라또 주인장 소유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1년 중 5개월만 운영해서 수지가 맞을 수 없다.
젤라또 가게가 9월에 문을 닫으면서 동네에 선포하는 바가 된다.
" 음침한 계절이 또 왔네요. 다들 정신 건강히 지내고, 새 봄에 만납시다. "
닫힌 젤라또 가게의 문은 동네 사람들에게 겨울을 경고해 준다.
주민들의 젤라또 가게에 대한 애정은 가게의 경고에 맞장구치는 듯하다. 그들이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어떻게 아냐고?
메뉴판을 살펴보자.
스파게티
라자냐
피자
아이스크림 이름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메뉴판이 아니라 독일 젤라또 가게의 메뉴판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스파게티 젤라또를 한번 시켜볼까?
얼굴 만한 접시 가득 스파게티처럼 가늘게 국수 형태로 뽑아진 아이스크림이 수북이 쌓여있고 그 위엔 와플 과자와 초코, 딸기 시럽이 풍성하게 뿌려져 있다. 가격은 8유로, 우리 돈 만원 정도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독일 장정들이 퇴근길 저녁 젤라또 가게 앞 노상 테이블에 서넛 모여 스파게티 아이스크림을 1인 1 접시 해치우며 수다 떠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아이스크림 사랑이 절로 느껴진다. 가게 앞은 국철이 다니는 대로변이라 뷰라 할 것도 없다. 단층 주택이라 커다란 콘 아이스크림 형상의 휴지통이 없다면, Eis라고 무채색으로 쓰인 간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젤라또를 사려면 늘 대기가 길다. 아이스크림 가게의 오픈은 살 만한 날씨가 왔다는 의미니, 기꺼이 가게 밖까지 줄을 서서 기다린다. 싱싱한 이탈리아식 젤라또를 먹으며 봄을 음미한다. 또 봄은 왔구나. 무사히 어둡고 컴컴한 독일의 겨울을 지난 것을 축하하는 바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던 젤라또는 델피노, 돌고래 맛이었다. 이태리식 젤라또란 수제이고, 매일 만드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돌고래 등 같은 청아한 파란색은 어떻게 만들어내는 것인지 궁금했다. 파란색 맛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맛을 보면 우유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레몬 소르베 맛이라 인공색소를 썼나 보다 했다. 한 스쿱에 2유로 우리 돈 2500원이면 어린이들은 행복해했다.
호박씨는?
젤라또 가게 앞에 앉아 오가는 U-bahn 국철에서 내리는 독일인들을 바라보며 일 벌일 꿍꿍이를 꾸미곤 했다. 나의 꿍꿍이는 치킨집이었다. 이 가게의 위치야 말로 가맥집이 딱이다. 독일인의 식사량이라면 1인 1 닭을 하고도 남는다. 치킨을 튀기는 거지. 양념은 사이드로 내는 거야. 한국 소주는 비싸니까, 가성 좋은 독일 병맥주에다 소주를 넣은 소맥을 시그니쳐 음료로 하는 거지.
델피노 한 스쿱도 남기는 한국 아이들과 대접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는 독일인들을 번갈아 보며, 상상 속 치킨집이 나를 독일성의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믿었다. 씩 웃어본다. 아이스크림 휴지통 되진 소주 모양 에어간판을 사우는 거야. 젤라또집 주인장처럼 1년에 절반만 일하는 독일에서의 삶이란 상상만으로도 흡족했다.
그리고 오늘. 5월 16일 낮기온 30도가 넘는 서울의 베스킨라빈스3*앞에 섰다. 젤라또처럼 크리미 하고 소르베처럼 상큼한 것이 그립다. 365일 즐길 수 있지 않아, 한시적이며 찰나인 것은 짜릿하다. 늘 그 자리에 있어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바에야 잠시 자리를 비워 존재를 깨닫는 과정이 내겐 흡족함을 준다. 고를 것이 넘쳐나고, 슬리퍼를 끌고 10분을 채 못 걸어도 치킨집과 아이스크림가게가 즐비한 여기서 괜한 투정을 부려본다. 뭐든 부족해야 소중하다. 굶어야 뭐든 맛있고, 어렵사리 구해야 귀하다. 진리는 젤라또 가게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혹여 호박씨가 다시 독일 간단다면 치킨 소맥집 차리러 가는 줄 아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