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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n 24. 2023

감자탕을 끓이는 마음이 닿는 데까지

즉석사진처럼 마음속에 찍힌 표정이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던 찬 공기에 닿은 수증기가 만든 하얀 김만큼이나 얼어붙은 마음과 피로가 엉겨 붙은 어깨를 피부로 느끼던 날이었다. 


" 할머니처럼 무슨 돈을 들고... 언니도 참." 

그녀를 알았던 10년, 그녀와 가까이에서 보낸 5년 동안 안에서 그녀가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던 순간도 없었다. 독일 학교 방학이 시작되면 늘 한국행을 이였으니, 12월 칠흑같이 캄캄한 독일을 남겨두고 아이들과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유별날 것도 없다. 주재원들 또한 특히 H 계열사의 경우, 한국행 티켓이 연말에 나오기에 프랑크푸르트의 한국인들이 겨울에 고국을 방문하는 것이야 흔하디 흔한 일. 그녀도 긴 독일 현지 학교의 겨울방학이 끝날 때 즈음인 1월 2주째이면 돌아와 그녀의 가게 카운터에서 그녀를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난 그녀가 보고 싶을까? 꼭 만나야겠다 싶었다. 빈 손으로 얼굴 보기 멋쩍었다. 그녀의 두 아이들과 인천공항 닿자마자 사 먹을 떡볶이와 어묵 값이라도, 공항버스비라도 쥐어주고 싶었다. 망설였다. 한국 돈과 카드를 넣어두는 통장지갑엔 천 원짜리 서넛과 만 원짜리 달랑 한 장뿐이었다. 그녀가 늘 부러워하던 것이 우리 집은 자타 공인 한국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아파트 1동 8 가구 중 늘 5 가구는 한국 가정이었으니 한국돈이 부족한 날, 아이에게 연락이 닿지 않고 외출해야 해서 열쇠를 맡기려면, 하다 못해 잠시 외출한다고라도 고할 수 있는 아날로그 방식이 통하는 건물이었다. 

 유로를 원화로 바꿀까? 말까? 그녀와 아이들은 분명 돌아올 터인데, 왜 나는 이렇게 뭔가 챙겨주고 싶은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 다녀오면, 늘 그랬듯 그녀의 두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불러서 먹이면 되겠지 했다.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일명 선물 가게,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유럽 제품을 모아서 파는 잡화점을 운영하는 그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이들을 데려다가 밥 해 먹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1만 4천 원이면, 공항에서 요기는 할 수 있을 거야. 아래 윗집에 한화가 있는지 묻지 않고, 꾸깃한 지폐만 챙겨 나섰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말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S 씨,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5분 거리의 그녀의 집으로 언제 돌아가는지 물었다. 여느 때의 그녀였다면, 지금 퇴근 준비 중이니 엉망진창이지만 그녀의 집으로 그냥 오라고 했었을 터이다. 

" 지금 얘들 챙겨서 나가려 더 참이었어요."

" 아, 그럼 나 15분이면 가니까, 좀 기다려 줄래요? 한국 가기 전에 얘들 얼굴 보려고." 

멋쩍어 그녀의 아이들 얼굴을 보겠다고 둘러댔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니까. 

사실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꼭 그녀의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 싶었다. 





독일의 고속도로와 국도 대부분 조명이 없다. 어둡다 못해 시커먼 밤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갔다. 

다신 못 볼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 모르겠어... 


수도 없이 들락 거리던 에쉬본의 라운드어바웃을 지나 그녀의 가게 앞에 이르니 간판등이 꺼져있다. 차를 세우고 그녀의 차가 주차되어 있을 건물 뒷문 쪽을 가니 그녀가 아이들을 태우고 있었다. 

" M아!"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딸 이름을 불렀다. 딸아이와 동갑인 M은 이 시간에야 엄마를 따라 집에 간다. 늘 그녀가 마음 아파하는 바였다. 불쌍한 우리 M, 불쌍한 우리 아들. 


 독일로 온 지 2년 만에 S와 S의 남편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 강남에 위치하던 그들의 집 전세 보증금을 회수하긴커녕,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독일로 떠나올 때의 자금들은 구매대행 재고에 묶여 물건으로 그 모양을 변신해 존재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돈이었지만, 그들에게 많은 건 독일 기저귀, 압타밀 분유, 프랑스 화장품, 북유럽 접시였다. 

" 언니, 저희 이 가게 인수하는 거 비밀이에요. 가게 사장님이 저희 부부를 예뻐라 하셔서 특별히 싸게 주시는 거라서요. " 

그녀가 가게를 인수받고 6개월 뒤 에쉬본 구 시가지는 환경 개선 작업으로 대공사에 들어갔다. 그녀의 가게를 운전해서 들어가기엔 여러모로 불편했다. 주재원 아줌마들의 운전실력도 좋지 않거니와, 공사하지 않는 선물가게로 찾아서 손쉽게 주차하면 될 일이다. 공사가 진행되고 길이 파헤쳐지는 만큼 그녀의 근무 시간은 늘어났다. 

물건으로 변신한 돈들을 회수하기 위해 가게에서 퇴근하면, 구매대행 상세페이지 제작 작업으로 날밤을 샜다. 아이들 끼니는 라면, 그녀의 끼니 또한 즉석국이었다. 독일은 돼지뼈, 소뼈를 먹는 이가 없다. 헐값에 싱싱한 돼지뼈를 구해다가 한국서 고이 챙겨간 곰탕 냄비에 감자탕을 끓였다. 꽁꽁 얼려 그녀의 냉장고에 채워 넣어주고 오면 그리 뿌듯할 수가 없었다. 

맛있게 먹고 난 그녀가 새벽시간 보내온 사진에는 그녀의 한탄과 한숨, 비탄이 묻어났다.

언니, 저 자고 싶어요. 

언니 감자탕 덕분에 살았어요. 

그녀의 메시지 속엔 " 언니는 독일 와서도 감자탕 끓여 먹고 사니 좋겠어요."라는 의미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나.

불쌍한 아이들.

이 모든 고생의 시작은 독일로 오자고 한 남편. 

한국에서도 무능한 남편은 남의 나라까지 나를 끌고 와 주재원들 상대로 장사하는 장사치로 만들었구나. 





S가 아이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퇴근하는 통에 M의 손에 가져간 한국 돈을 쥐어주었다. 걸어가면 10분 거리의 집으로 아이들을 태우고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S의 차를 바라본 그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S는 위자료와 이혼을 요구하는 메일을 남긴 채 한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M의 독일학교에 손을 써둔 상태였다. 아무도 몰래 아이 학교를 정리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만나러 갔던 그날에 내게 그간 그녀가 했던 정리와 이별, 떠남을 위한 준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더라면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안아주었으리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녀를 위해 감자탕을 끓일 시간이 있던 나는 주재원 가족이었다. 내 옆에 있을수록 그녀는 더 깊이 찔렸을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되고, 한없이 어두운 그녀의 타향살이는 끝이 보이질 않았을 것이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종종 찾아온다. 모두 빛 한가운데 살고 있을 때 나와 나의 아이들만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들면, 사라져 버리고 싶다. 가까운 이들의 기쁨을 마음 놓고 기뻐해줄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웃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고 싶은 유혹이 들곤 한다. 거리유지,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로부터의 거리유지였다. 비참할 정도로 혼자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나의 이런 질투심과 곤경을 들키고 싶진 않다. 


독일의 돼지뼈는 싱싱하긴 하지만, 한국의 돼지보다 부드럽지 않다. 감자탕은 한국에서 끓여야 제 맛이다. S는 대전 어딘가의 그녀 언니 옆에서 아이들과 지낸다고 했다. 별거 상태인 그녀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독박 육아를 여전히 하고 있을 테고, 여전히 끼니 챙기기 어려울 것이다. 도란도란 앉아 감자탕이 맛있게 만들어지길 기다리며, 그녀와 이야기 나누고 싶다. 별겨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우린 독일에서 얼마나 서로에게 위안이 되었었는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하고 싶다. 내게 다신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누구나 힘들다고 적절한 공감을 하며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 내겐 다시 한번은 아직 오지 않았다. 


대문 사진: UnsplashNathan Duml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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