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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Jul 09. 2023

당신에게 축제란 무엇인가요

내게 필요한 건 축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한 축제다. 축제가 뭐길래? 


축제는 약속이다. 무사히 살아있을 거라는 약속, 당신이 다음 축제에도 건재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1월 중순이 되면 Rathaus, 라트하우스(쥐의 집이 아니다.)에선 달력을 나눠준다. 또는 Oberurusel 오버오젤 주간지사이에 새해 1년어치의 축제 일정 명칭이 다홍색 활자로 찍혀있다. 전년도와는 다를 바가 없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기간의 축제는 1년 동안 펼쳐질 예정이다. 

 마치 봄이 지나면 으레 여름이 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을이 지나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해 없는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달력은 곱씹어 준다.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 또한 지나가리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축제를 통해 일관됨이 주는 질서 속에 현재의 공동체가 속한 혼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찌하여 올해엔 이토록 여름이 일찌감치 온 것일까 하며 기후변화를 고민한다. 마스크를 쓰고 축제에 참가해야 하는지의 선택지에 대해 고심하다 보면 내가 몸담고 있는 집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피부로 실감했을 것이다.

 

 지낸 시간은 5년이지만, 온전한 1년 또는 온전한 50년이었다고 하더라도 유럽에서의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계절에겐, 아니 시간에게 당신은 한 없이 작은 존재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의 존재 여부에 상관 없이 지구별의 시계는 흘러간다. 슬프게 느껴지는가? 세상의 중심이라 믿는 그대의 존재와 지구의 무관함이 허무하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덧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의미를 찾아보자면 축제는 당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으레 축제가 오리라 여기며 머리를 맞대고 퍼레이드 차의 생김을 의논하는 그대가 없다면 흘러가는 계절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봄은 덧없이 오곤 하지만, 그 봄을 나만의 봄으로 2023이라는 숫자를 달아 기억해 주고 되새기며 즐거움이란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스쳐 지나가고 이와 동시에 날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 어김없이 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양날의 칼처럼 안도와 감사를 쥐어주기도 하는 한편, 흥분과 설레을 가져오기도 한다. 




웬만해선 친정아버지에게 전화 올 일이 없는데, 이번 주엔 통화를 두 번이나 나누게 되었다. 여름이 되면 엄마의 화병, 불안증, 나도 뭐라 이름 지을지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곤 했다. 약국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손목과 허리를 다친 것도 여름, 화장실에서 새어 난 거실의 물 위를 뛰어가다 발목을 다친 것도 여름이었다. 

올여름 엄마는 몸이 아니라 다친 마음을 헤집고 있는 중인가보다.


" 엄마, 얘들 유산균 가지러 갈게!"

" 응, 약만 가져가라. 저녁은 같이 먹지 말고." 

딴엔 용기를 내어 함께 얼굴 맞대고 한 끼를 즐길 기회를 만들었는데, 밥은 먹지 말자고? 유산균은 빌미라는 사실을 엄마는 눈치채지 못한다. 엄마의 여름병이 도졌다. 된통 왔나 보다. 

엄마와 통화가 월요일이었는데, 수요일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 엄마가 너네들 때문에 못살겠단다. 저녁도 안 차려 주고 집으로 가버렸다." 

" 일요일 저녁에 청계산으로 오세요. 얘들이랑 매주 가는데."

" 덥다. 산은 안 가련다."

 아빠, 두 딸들, 가족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고 퇴근해버리셨단다. 헛웃음을 지으며 엄마와의 말다툼을 내게 토로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에서 안타깝지만 세월을 느낀다. 



 

 오버오젤이란 동네 이름은 우르살라라는 매우 고전적인 이름을 가진 독일 성인의 이름을 땄다. 우르살라는 오버오젤을 침입한 외세에 맞서 동네를 지킨 여전사다.  동네 축제는 페스티벌 행렬을 주된 의식인데, 행렬의 요충지는 우르살라 광장이다. 방패와 창을 들고 있는 우르살라 모양의 낡은 청동상이 가운데 서있는 우물이 광장 인근에 위치하고, 우물에서 광장까지 연결된 인도는 1000년 넘은 세월이 묻은 돌바닥이다.  맨발로 혹은, 멧돼지 가죽신으로,  또는 하이힐로 반들반들하고 단단하게 다져진 검은 바닥에 대한 기억이 내게 소명을 일깨워준다.

가족을,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고, 지키렴. 우르살라처럼 말이야. 

 

 일요일 저녁 청계산행은 긴 고민 끝에 만든 행사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를 가는 친정 식구들처럼 매주 아침 일찍 청계산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올랐다가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신분당선을 타고 돌아오면 딱이었다. 6월부터 찾아온 찌는 여름 때문에 아침 산행을 저녁 산행으로 바꿨다. 말이 산행이지 부르기 민망할 지경이다. 청계산이라고 이름 지어지는 경계를 지나 오르막이 시작되는 첫 번째 쉼터에서 발길을 돌려 청계산역 주변 순두부집을 향한 게 다이기 때문이다. 

우린 같은 짓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산을 향하고, 초입에서부터 나무들이 내뿜는 그들의 숨을 맡는다. 땀이 남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어김없이 외친다. 

" 두부 먹고 싶어!"

" 힘들어!"

여기까지 왔는데 본전도 못 챙기네 따위의 생각은 집어치웠다.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축제에 본전이 어딨 다고....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이 축제의 본질이다.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약속하면 된다. 다음 주에 또 올 거야, 그 땐 단 한 발짝만 더 걷고 가면 되지 하면 그만이다. 오늘은 끝이 아니다. 우린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길 비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축제다. 내 나이가 훌쩍 50을 향해가는 만큼 부모님도 연세가 드셔 억지 명절을 열기 어려워지셨다. 더 이상 명절에 오라고 말씀하실 수 없게 된,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며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퍼레이드에 매달린다. 이런 내 마음을 친정 부모님은 모르실 게다. 여전히 그분들께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며, 대다수의 기득권이 고개 끄덕일 수 있는 정도의 일만 벌이는 19살의 모범생이니까. 

두 분의 부부싸움에 낄 생각 없다고 하니, 아버지가 마음이 편협하다 하신다. 동생을 꼬드겨 가게를 열게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엄마의 비난에 귀를 닫겠다고 선포하니 이 또한 아버지가 말 좀 이쁘게 하라 하신다. 엄마의 여름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신경 쓰이지 않는 짓만 골라서 살아볼까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제 더는 그만이다. 청계산 갈 시간이 두 시간 남았다. 작은 나의 공동체 일원들은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져 주어진 자신만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축제를 즐기기 전 이 고요함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한국의 우르슬라는 축제도 좋아하지만, 축제를 앞둔 이 정적을 더 사랑한다. 기꺼이 용감해질 것. 고요가 말한다. 무뎌지지 말고, 이 순간순간을 즐기는 삶의 창에 날을 세울 것. 정적이 고개를 끄덕여준다. 

무한한 긍정! 내게 매주 축제를 행할 용기를 준다. 

당신에겐 축제란 무엇인가요? 


 사진: UnsplashIgnat Kushanr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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