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박씨 Sep 03. 2023

생리와의 이별, 독일과의 인사

나이 든 여자가 된다는 건 노화와의 맞대결이다. 지난달은 생리가 거의 안 나오다시피 했다. 인턴 첫 달, 20년 만에 임하게 된 사무직 덕에 긴장이란 긴장은 다 했나 보다. 이렇게 폐경이 빨리 오는가 보다 하면서 내심 좋아라 했다. 30년을 경험하지만, 낯설고 불편한 생리와의 작별은 반갑다.




라트하우스, 독일 오버오젤 시내 동사무소 앞이었다. 읍내 공용 주차장에서 자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평행 주차 솜씨가 바닥인 나에게 동사무소 길 건너 폴리짜이, 경찰서 앞 주차장 자리가 연속 2대만큼 비어있는 경우는 드물다. 기분 좋게 주차하고 읍내 과일 가게와 Chibo, DM에 들러 장을 봤다.

생리 중이었다. DM에는 생리용품이 가득이다. 사용해 본 적 없는 템포, 생리컵, 저렴한 생리대까지 여성을 위한 디테일이 한국에 비하면 널리고 널린 셈이다. 문제는 즐기지 못하는 나였다. 밑이 빠질 듯한 기분이었다. 생리혈 양이 많아 아래가 내내 묵직하다. 온몸의 피가 오늘 자궁으로 빠져나가려나 봐 싶은 기분이다.

장착하고 나간 독일표 생리대인 always는 피부 트러블이 없어 좋긴 한데 생리혈 양이 많은 내겐 얇다.  흔히, 독일 여자들은 템포를 장착하고 생리대를 부가적으로 사용한단다. 그러니 수면 시 사용하는 오버나이트 생리대도 한국의 일반 생리대 정도의 두께밖에 되지 않는다. 에효. 생리컵과 템포를 노려본다. 주변 많은 주재원 엄마들은 영어 학원과 한국인 수학 선생님에 대한 디테일 그리고 식구들 먹일 소고기 부위를 독일학 박사처럼 꾀고 있다.  독일에서의 편안한 생리 기간을 위한 꿀팁은 그 누구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국제 학교 단톡방에서 5년 내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질문이다. 우리에게 제1의 질문인데 말이다.

장 보는 걸음 하나하나 불편하다고 해서, DM에서 생리 용품을 구매하고 집 밖에서 사용해 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오버오젤 읍내에서 화장실을 찾는 일이야 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 구하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라트하우스 건너편의 오버오젤 읍내 오페라하우스 화장실이 깨끗하고 공짜라는 사실은 몇 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라트하우스 주차장에 딸린 공용 화장실은 오십 센트와 이십 센트 짜리 동전, 이 2개를 정확하게 투입해야 이용할 수 있는 데다 좁고 냄새가 심하다. 생리대 교체하기 싫은 환경이다.

그러니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차로 향했다. 차에 거의 다다른 순간 뜨끈한 덩어리 피가 사타구니 쪽에서 느껴졌다. 얼굴이 붉어졌다. 진한 색의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아무래도 누군가의 눈에 새어 난 피가 보일 것 같아 당황스럽다. 장바구니를 뒷좌석에 쑤셔 넣다시피 하고 운전석에 앉아 청바지를 보니 진해진 청바지가 눈에 띈다.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운전석 시트에 피가 베일까 봐 걱정, 차에 타기 전 누가 봤을까 걱정 머릿속이 시끄러워 운전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남편은 지난 월요일 독일 출장을 가며 우울한 얼굴이었다. 연말 독일 발령 날 확률도 없는데, 독일 가서 일주일을 일하려니 속상하단다. 배부른 소리 하는 거 같다. 지금 가면 유럽 날씨가 얼마나 좋을까 싶다. 늦여름 로렐라이 언덕 주변으로 라인 강을 따라 푸른 포도가 익어갈 터이다. 회의 일정이 바빠도 포도밭 가볼 여정은 뺄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배부른 소리 맞을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포도밭 위 구름 사진을 가족 단톡방에 띄웠다. 유럽 구름이 너무 좋다며 말이다. 산책길이었다. 생리혈 양이 지난달에 안 한몫까지 더해진 태세였다. 산책길이어도 걱정 없는 것이 한 블록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데 깔끔한 정도가 우리 집 화장실 보다 낫다. 생리대도 넉넉히 챙겨 왔기에 생리대 교체하는 게 귀찮긴 하지만 산책 나설만하다. 그렇게 혼자 생리 중 걷는 산책 길, 남편은 지구 반대편에서 주재생활을 바라며 라인강변을 바라보고 있다.

"독일 다시 가고 싶어."

남편은 어제 출장서 돌아와 잠들기 직전 나직이 읊조린다. 잠꼬대처럼, 잠꼬대 아닌 마음 저 바닥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어본다. 2배가 되어버린 생리혈과 2배로 나를 덮친 허리 통증이 독일이었다면 내내 불편했을 거라 추측하며 그 옆에 눕던 찰나였다. 난 좋게 생각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산다. 오늘은 지금 현재를 즐기면서 도망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살려한다. 자다 중간에 깨서 생리대를 바꿔야 하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사이즈의 취침용 생리대를 파는 한국이 좋다. 아무 데다 널린 깔끔한 한국의 공짜 화장실이 좋다.

그리하여 나의 생리 라이프 때문에 독일에 다시 주재원으로 나가고 싶은 남편의 바람에 맞장구치지 못한다. 그의 등을 긁적거리며 말한다.

" 지금도 좋아, 우린."

맞다. 지금도 좋다. 한국도 행복하다. 내겐 그러하다.


사진: UnsplashTim Marshal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