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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Sep 09. 2023

아름다운 사내 연애인지, 부적절한 사내 폭력인지

둘이 사귀는 거 같더라. 느낌이 있었다. 블로그 하는 여자친구의 체험단 당첨 덕분에 공짜로 일본 여행 갈 수 있다고 했던 점심시간  대표의 표정이 떠올랐다. 여자친구에 대해서 우물쭈물 넘어가는 대표를 보면서 MZ들은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기 싫어하나 보다 짐작했었다. 그 우물쭈물은 사내 연애라서 우물쭈물 이였던 거다.

" 내 콜라 어디 갔어?"

" 흐흐흐흐."

사무실 냉장고에 대표가 넣어둔 콜라를 K가 몰래 먹고는 키득키득거릴 때 느껴지던 콜라 같은 청량함은 갓 서른이 된 이 젊음들의 연애사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었다. 연구원 K가 사실은 대표와 사귄다고 말해주기 전까진 그 연애 기운을 피부로 느끼기만 했지 상상하진 못했다.

지난 5월에 결혼한 사수와 이사의 부부 관계에 이어 늙은 인턴은 뒤통수 한 대를 또 맞은 셈이라, 사수에게 또 다른 놀라운 사내 커플이나 관계가 있다면 이제 풀어내달라 부탁했다. 다음 달부터 정규직으로 계약하기로 한 마당이니, 얘기해 줄 법하지 않은가? 더는 없단다. 글쎄, 두고 볼일이다.

연구원 K는 20년 전 H를 떠올리게 한다. 고운 화장과 발랄한 몸짓, 높은 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센 언니 캐릭터를 보며 H에 대해 기억했다.



빠른 79인 H는 마침 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같은 분당 거주자에 같은 고등학교 졸업에 예쁜 여성인 그녀가 좋았다. 입사한 지 4년 차 된 그녀는 갓 입사한 내겐 믿을만한 언니같이 느껴졌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 외의 시선은 ' 여우 같은 마케팅 대리'였다. 가냘픈 몸매에 긴 생머리인데 화장은 진했다. 여성스러움의 극치였지만, 영업에 있어선 술 잘 먹고, 대기업 거래처와 의사소통에 능했다. 퇴사하다시피 전 회사를 그만두고 한의대 가겠다고 수능 준비를 한 나의 세월들을 나무라는 듯한 존재가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보여줄게. H라는 존재가 내게 던진 메시지였다.

정보통신협회 주체로 1박 2일 사장과 워크숍에 참석한 다음날, 그다음 날도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3일째 출근한 그녀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쌍꺼풀이 깊은 눈이 퉁퉁 부워 외꺼풀이 되어있었고, 두꺼운 피부 화장에도 푸석함이 엿보였다.

 그녀와 점심을 같이 먹곤 했던 나에겐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녀의 부재가 컸다. 그녀와 자주 가던 일식집 만 원짜리 점심을 한 숟가락 뜨려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 덮치려고 하더라고... 사장이...."

내가 당한 일처럼 느껴졌다. 워크숍 밤 그녀에게 가해진 사장의 완력이 피부로 느껴졌다. 3일이 지나 내게 말하면서도 붉어지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자 속에서 뜨끈함이 치밀어오른다.

" 대리님, 부장님께 말씀드렸어요?"

직원이 50명 남짓인 중소기업이니, 마케팅 팀은 대리인 그녀가 팀장이자 팀원이다. H의 팀은 경영지원팀이라 그녀는 회계팀과 한데 묶여있어, 사장의 오른팔인 회계부장 CFO가 그녀가 소속된 팀의 팀장이었다. 갓 50이 된 회계부장은 그녀를 다독거려 워크숍에서 사장이 감행하려 했던 폭력을 잘 덮었다. 믿음직한 사장의 오픈팔 답다. 대리는 없던 일처럼 그 후로도 마케팅팀으로 출근했고, 전처럼 사장과 동행하여 거래처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그렇게 20살 후반의 우리, H와 나는 어린 여자로 비치며 그 시절을 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그때를 돌이켜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 기억을 되감아 본다. 성폭력을 당할 뻔한 건 H였지만, 그만둔 건 나였다. H가 당한 일이 그녀만큼 예쁘지 않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내내 사장 얼굴을 볼 때마다 욕지기가 나오는 건 참기 쉽지 않았다. 사장의 존재가 나에게 세상을 두렵게 만들었고, 사장이 행사한 폭력으로 세상을 등지고 시집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해 주었다.



 

 곰돌이 푸우처럼 말이 없는 사수와는 달리 K는 발랄하여 인턴 2달 차인 내게 말을 잘 걸어준다.

"제가 비밀 하나 말씀드릴까요?"

비밀도 발랄하게 이야기하는 K가 좋다. 회의하면서 거래처에 대해 쌍욕 날리는 K의 마알간 영혼이 말그릇에 담긴다.

" 사실, 저 대표님이랑 사귀어요."

그래서, 회의시간에 K가 말하면 대표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구나. 이제야 모든 실타래가 풀린다. 늙은 인턴이라 감은 빠르다.

대표와 K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함께 사 오면서 큰소리로 웃어대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잠봉뵈르를 먹는 나를 힐끔 보며 웃음소리의 성량을 줄인다. 안 그래도 되는데.... 출근길에 사 온 비싼 잠봉뵈르 맛보다 남자친구인 사장과 함께 먹는 이천 원짜리 샌드위치가 더 달콤한 법이다. 그와 뭘 먹어도 좋을 것이다.

직원 9명의 이 작은 스타트업 원년 멤버인 K는 이 회사를 다닌 지 4년 차다. 대표와의 연애관계가 깨지더라도 K는 꾸준히 일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까지 나온 그녀지만, 스타트업을 선택했고 샌드위치 속 양상추처럼 아삭한 사회생활을 맛보았기에 기꺼이 세상과 마주할 예정이다. K의 명랑함이 늙은 인턴 호박씨의 나이에 이르길 응원한다. K는 모를 테지만 말이다.

 유연근무제라 5시가 채 못 되어 집에 도착한다. 딸이 학교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들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재잘거리는 딸을 보며 K를 떠올린다. K에게 던지는 나의 응원이 나라는 해변에서 시작해 큰 파도가 돼 딸의 바다에 닿길 빈다. 딸이 세상에 났을 땐 그 어느 누구도 아이가 원하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길, 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기력하게 돌아서지 않는 세상이 되기 원해서 오늘의 나는 힘껏 돌멩이를 던진다. 일이라는 바다에 매 모든 시간을 던진다. 더 나은 세상이 호박씨 한 사람의 늙은 인턴생활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엉뚱한 꿈을 꾼다. 무기력하게 돌아서야헀던 H와 함께 먹은 점심이 다신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오늘 아침도 몸을 일으켜 2호선 성수행 지하철로 향해야 한다.


사진: UnsplashJoakim Nåd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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