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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어머니

by 호박씨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에 대해서야 매 순간 고민했다. 어딜 둘러보아도 적당한 엄마는 주변엔 없어 보인다. 누나가 셋이나 있는 남편을 보면서 나도 남편 자리 옆을 비집고 앉아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지켜보다 따라가면 되겠다 싶었다. 남편이 치과의사인 큰 누나, 남편이 정형외과 개업의인 작은 누나, 한의사와 결혼했지만 이혼하고 형부의 정형외과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막내 누나. 멘토가 셋이나 되고, 언니가 셋이나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사는 데로 살면 되지, 그들이 오케이 하는 행동만 하면 되지 했다. 맨 손으로 딸들을 모두 의사에서 시집보낸 시어머니조차도 서른의 내겐 위인전 같은 존재였다. 막막하니 방향을 알 수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나만 하는 듯하여 외로웠는데 남편과 함께 내 편이 넷이나 생겨 좋다 했다.


" 점심 때 해둔 찬밥 먹어라."

갓 지은 밥 양이 부족한 듯싶어 안 그래도 어째야 하고 고민하던 차에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밥을 꺼내오신다. 전자레인지에 덥혀주기까지 하신다. 80이 넘은 어머니와 50 중반을 넘기는 큰 시누이는 사회활동 없이 집안일을 하고 지내온 세월이 전부다.

떠나간 남편이 그립다는 내색 없이 2년을 지내시는 어머니는 큰 사위와 작은 사위가 오자마자 없던 힘이 솟아나 부엌에서 나오시질 않는다. 사위들이 무엇을 좋아할지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가장 바쁜 어머니는 본인은 음식을 차리다 입맛을 잃어 기껏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준비한 음식을 드시지도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어머니를 따른다. 밥이 부족하다 싶으면 찬밥을 먹고, 회가 부족하다 싶으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한 땐 고가의 물건으로 백화점에 전시되어 있었을 테지. 식탁과 의자를 만든 이도 파는 이도 높은 경제적 값어치를 기대했을 것이다. 40년이 넘었어도 느낄 수 있다. 어머니의 부엌을 바라보는 자리엔 어마어마한 무게를 자랑하는 원목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식탁을 처음 마주하던 17년 전의 광택에서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화려한 굴곡을 뽐내는 육중한 식탁을 보면서 어머니라는 여자의 취향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듬직하고 무겁고 중후한 가구를 한결같이 택하신다. 세월을 거스르는 힘을 가진 물건을 선택하곤 하신다.

의자는 넷, 사람은 다섯이다. 어찌 의자가 넷일까 싶다. 어머니에게 자식이 넷인데 말이다. 큰 딸과 작은 딸을 의사에게 시집보내고 구입하셨나 보다. 만원이나 할까 접이식 간이 의자를 아버님이 어디선가 주워오셨고 명절이 돼 부산에 가면 구석에 접혀있던 그 의자가 나온다. 그 의자가 내 자리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크고, 시누들의 친정 방문이 좀 뜸해지기 시작하는 즈음에도 그리고 이렇게 아이들이 다 크고 아버님이 세상을 떠난 지금도 접이식 의자 자리가 며느리의 자리다. 어머니의 식당에선 이것이 룰이다. 밥상 차라기를 도와달라고 아이들을 구지구지 내가 부른다. 아이들은 반찬도 나르고, 수저도 챙겨 내지만 본디 식탁에 딸린 원목 의자에 앉는다. 아내의 허리 상태가 신통치 않다는 것을 잘 아는 남편 또한 자리를 바꿔줄까라는 제안 한 번 할 수 없다.

어머니가 명절맞이로 담그신 김치 맛이 워낙 좋아 다들 밥 양이 는다. 달큼한 가을배추를 찢어 담근 빨간 김치는 밥도둑이다. 남편은 고기 파라 밥은 손도 대지 않고, 수육과 굴비 반찬만 먹는다. 어머니 김치에 쌀밥이 최고인데, 남편은 이 맛은 모른다. 남편 밥공기에서 한 숟가락을 크게 덜 어내며 " 한 숟갈만 먹을게." 하니 남편이 밥공기 째로 내민다. 그가 내 쪽으로 내민 공기에 어머니의 숟가락이 들어온다. 방금 덜어내 간 숟가락 보다 족히 2배가 되는 밥이 그의 밥공기를 채운다.

아들의 밥을 덜어내는 며느리에겐 한 마디가 없으시고, 그저 본인의 밥을 아들에게 내어주신다.




요샌 어떤 시어머니가 되어야 하나 싶다. 긴 추석 연휴 내 어머니를 바라보며, 아들이 나보다 머리하나가 더 커지면서 내겐 집안의 어떤 여자어른이 되어야 할까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른다. 올해는 조카도 둘째, 셋째 누나도 오지 않아 어머니와의 독대 시간이 길었다. 내가 어머니 나이 즈음이면 부엌에서 또는 식탁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마주할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싶다가도 혹여 내게 올지 모르는 그 시간에 멋있어지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들의 그녀 마음에 드는 호박씨가 되고 싶은 욕망이 내겐 크다. 마음에 든다기보단 그녀에게 어른으로 보이고 싶다. 세월을 거스르는 적당함으로 존재하고 싶다. 시간이 지나 볼품 없어지는 기성 가구처럼 누군가의 마음에서 폐기당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유일하게 이번 명절에 시댁에 온 큰 누나도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그들이 지난 시간 속에 그들에게 기대되는 바는 남은 음식을 먹고, 가장 늦게 숟가락을 뜨며, 제일 차고 딱딱한 자리에 앉는 삶이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리하여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여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익숙해한다. 마음속에서 그들을 폐기하거나, 볼품없게 여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큰 욕심이라면 멋있는 시어머니로 보이고 싶다는 바이지만 무리라면 작게나마 바라본다. 먼 미래에 아들이 데려올 그녀에게 나는 시간을 뚸어넘는 반짝임과 클래식함으로 보이고 싶다. 부디 그녀가 마음이 바다 같이 넓거나, 나보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혜로웠으면 좋겠다. 명절 시댁에선 이기심이 자란다. 내 욕심이 지나친 욕심은 부디 아니길 비는 마음으로 시어머니와 큰 누나를 마주한다. 그들의 어떤 행동도 따르고, 그들의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인다. 비록 옳다고 맞장구를 치거나, 미소를 띠어 동의해 주긴 힘들어도 따르고 들음으로써 최선을 다하는 것, 장차 멋진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는다.


대문 사진: UnsplashAnita Austv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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