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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Oct 14. 2023

고진감래는 가을이 제 맛이다.

날씨 좋은 주말이다. 아침에 비가 뿌려 기온이 적당하고 하늘이 맑기 그지없다. 독일에 있는 시간 동안은 중국 경제가 성공가도였던지라 서울은 미세먼지로 가득했었는데, 돌아와 맞은 코로나 때문에 ( 덕분이라 해야 하나) 세계의 공장이 멈춤세로 돌아서 맑은 하늘을 집 밖에서도 볼 수 있는 가을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마스크를 벗는 날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해서 꿈도 꾸지 못하였었다. 마치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이 지나 여행을 가고, 만나고 싶은 이를 만나는 시간이 왔다. 

어떤 고통이건 그 어려움을 겪고 지나간 이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역경은 쉽게 잊히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남는다. 경력을 이어 스타트업에 취업을 하고 젊은 그들을 마주하니 그들에게서도 어김없이 어려움의 시간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 코로나 전엔 동아리 같았어요. 모여서 점심 뭐 먹을까 사다리도 타고."

혼밥 하러 나가는 연구팀장에게 점심을 샀다. 점심으로 도시락으로 매일 받아서 함께 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그녀가 답한다. 그들에겐 그런 즐거운 시절도 있었노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5년 전 갓 대학원을 졸업하던 조금 더 어린 그때의 그녀가 담겨 있다. 독일을 이야기하는 나의 목소리 또한 그러하리라. 그 시간 속의 고통도 즐거움도, 어린 나도 목소리 속에 담겨 있을 것일지 모른다. 


 



남편은 계속해서 독일로 나갈 기회를 붙잡으려고 노력 중이다. 나의 취업은 살림에 보탬이 되긴 하지만, 공헌도가 그의 임금에 비해 적기에 그가 다시 독일로 나가게 될 상황에서 발생할 경력단절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소유한 회사인 양, 마치 대표인 듯한 마음으로 출근한다. 

집에서 무보수로 영원히 일할 뻔한 처지에서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생긴 상황만으로도 감사할 노릇이다. 2번을 사는 기분이다. 고통의 시간은 지나도 고통의 흔적은 뇌에 남아 지워지지 않기에 삶에 대한 기쁨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고통 덕분에 기쁨을 얻는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알아버렸기에 나의 출근은 슬프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애 닮아졌다. 진정한 기쁨이란 고통 끝에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가며 알게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때론 엄마는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어리석은 원망도 해본다. 엄마는 혹 아직도 모르고 계신 것은 아닐까? 

성적인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상사, 철들지 않은 나를 나무라다 손이 올라갔던 선배, 이걸 커피라고 타갔고 왔냐며 아침부터 구박하던 팀장, 그들이 한심하게 여겼을 나를 떠올리면 저릿하게 아픔이 밀려왔다.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에 세상을 손가락질할 수 조차 없었던 나는 출근하며 순간순간 기쁨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 진행하시는 체험단 일정 알려주세요."

" 세금계산선 내일까지 부탁드려요."

"오늘 중에 이체 집행 해주세요."

생각하고 꿈꾸던 일이건 아니건,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를 해내고 일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이 조직의 영원함을 도모해볼까에 대해서 눈을 마주하고 궁리하는 이 순간은 감사함의 극치다. 20년 전의 나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기억들은 차츰차츰 오늘의 기쁨으로 포장되고 덮혀져 이젠 거의 떠내려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인사철이 다가오고, 남편은 전전긍긍이다. 주재원으로 다시 나가느냐 마느냐는 것은 그 개인적인 바람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위한 일이라 여긴다. 내실 그가 바라는 것을 회사가 들어준다면 그건 그의 역량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기에 그에겐 극강의 기쁨이 될 예정이다.  내겐 경력 단절이 다시 닥칠 예정임에도 말이다. 

 위안을 삼아 본다. 비숙련자로 사는 게 내 삶의 태반이었다. 학생으로 최고의 성과를 거뒀던 시간을 제외하고 성인이 되고부터 난 늘 무지에서 오는 실수와 피로에서 오는 실패를 거듭하는 자였다. 사는 동안 죄송합니다만 말을 얼마나 했을까 세어본다면 기네스북에 오를지도 모른다. 실수로 죄송하고, 실패로 죄송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서 죄송한 삶, 그게 여적까지의 나였다. 그러니 다시 독일에 나가게 된다면 난 또 죄송하고 실패하고 실수로 점철된 삶을 살 예정이다. 

그럼에도 내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나를 떠나가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남 그 누구와 비교하길 멈추고, 그저 나라는 존재의 역사로 바라본다면 어제의 나보단 분명 성숙한 나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같은 나이의 누군가가 어떻게 하고 살고 있다더라, 같은 성별의 누군가는 어떤 생김을 하고 산다더라의 모자란 발상이 떠오르는 순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런 비교와 질투, 시샘의 소모적인 생각이 나를 찾아오면 그 생각을 잠시 눈앞에 내려두고 한껏 째려본다. 그렇게 타인을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좀 더 나를 살펴야겠어하며 스스로를 한 번 안아주는 시간. 이것이 경력을 잇는 기회를 가진 자, 주재원이란 혜택을 누렸던 자, 원 없이 공부할 시간을 가졌던 자가 가져야 할 덕목이다. 

그래야만 한다. 조심스레 누리는 기쁨과 갖춘 덕목을 함께 사는 이들에게 흘려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곁에 있는 이들에게도 꺼내어본다. 행여 그들이 고통의 시간에 처해있다면, 곧 고통이 끝나고 최강의 기쁨이 오리라는 희망을 물어다 주기 위해서 이다. 또는 그들이 역경의 초입이라면, 역경의 의미에 대해서 되새겨주며 스스로에게도 두려움을 물리치도록 다독인다. 타국에서의 생활뿐 아니라, 내 나라에서의 삶 또한 매일이 여행이며 매일이 새롭기 때문이다. 같은 날이 단 하루라도 있던가? 하루하루 새로운 날 뿐이라 어렵고도 즐거우며, 기쁘고도 애달프으니 제대로 살고 있나 보다 한다. 

그러니 유럽 가지 못해 전전 긍긍한 남편에게도 괜찮을 거다며 위안을 건넬 수 있고, 50점에서 60점으로 10점이나 오른 딸아이의 수학 성적에 감사하기도 하며, 20만 원 더 오른 월급에 빙그레 웃을 수 있다. 

구름 낀 날은 구름가 찬 대로,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대로, 그리고 오늘처럼 시원하게 게인 날은 흔치 않아서, 다 좋다.  


사진: UnsplashDawid Tko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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