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재원 와이프들의 관심사
솔직히 말하면 화장실 청소를 즐기는 편이다. 최근 2년 동안에는 매주 월요일로 화장실 청소 날을 정해서 루틴으로 하고 있다. 코로나인 줄도 모르고 코로나를 앓던 열흘 동안 화장실 청소를 한 번도 하지 못했었는데, 화장실 청소라는 루틴을 하지 못했을 정도면 호박씨로써는 정말 아팠다는 거다. 그만큼 규칙적으로 화장실 청소하기를 지켜나가고 있다. 즐기는 거 맞다.
독일의 화장실은 건식이다. 화장실 바닥에 배수구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배수구 없는 화장실을 보고 그럼 화장실 청소를 어떻게 한다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한국에서는 안방 화장실, 욕조가 있는 바깥 화장실 두 개를 주말에 몰아서 청소를 했었다. 락스를 뿌리고 물을 끼얹어 시원하게 해치운다. 샤워기를 제일 뜨거운 물이 나올 수 있게 최고 온도로 맞추고,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의 양도 최고로 맞춘다. 널찍한 화장실 거울이 뿌연 김으로 가득 채워질 만큼 화장실 전체를 뜨거운 기운으로 한바탕 끓여낸다고나 할까? 고온으로 빨래를 돌리고 나면 세탁기 문을 열었을 때 밀려 나오는 그 뜨근 뜨근한 기운과 섬유유연제 향기에 항상 세탁물들을 새로 탄생시켰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화장실 청소도 그렇다. 힘껏 틀어둔 샤워기를 끄고 화장실 문을 연 순간 등 뒤로 느껴지는 뜨거운 김과 상쾌한 락스 향을 맡으면 오늘도 내가 새 화장실 하나 낳았어하는 뿌듯함을 느낀다.
이 독일 화장실, 이런 화장실 탄생 의식이 불가능하다. 배수구가 없기 때문에 힘껏 샤워기를 튼다는 것은 화장실 밖 집안으로 홍수를 일으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독일의 수도세는 비싸기로 악명이 높다. 독일 도착 1년 동안 아이들의 탕목욕을 시키지 않았는데 탕 목욕을 하면 수도세가 얼마나 나올지 실험해보기 싫어서였다. 비싼 전기세로 조도 자체가 낮은, 컴컴한 독일 집에 사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굳이 탕목욕을 해서 독일 정부에 비싼 물값을 내고 싶진 않다. 그러니 세찬 샤워기 물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야 하는 상황이다.
주변 주재원 와이프들에게 화장실 청소 방법에 대해 물어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나에게 화장실 청소는 중차대한 일이니까. 아이들을 홈룸에 데려다주고 학교 로비에 앉아 있는 두 엄마를 발견했다. 지금이 기회다.
" 화장실 청소 어떻게 하세요? "
한 명은 김희애 씨가 '꽃보다 누나'에서 입고 나왔던 누빔 패딩 같은 밤색 버버리 패딩을 빼입고 있고, 한 명은 이 아침부터 풀 메이크업 상태이시다. 머리도 오늘 아침에 세팅하셨나 보다. 반짝반짝 곱게 컬이 된 멋스러운 그녀의 머리. 버버리녀는 아우디 A8을, 풀 메이크업의 그녀는 벤츠 s 클래스를 몰고 다니시는 분이다.
그래도 난 화장실 청소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 분들에겐 답이 있을 것이다. 버버리녀는 독일 살이가 벌써 5년 차이고, 벤츠녀도 주재원으로 나온 지가 3년이 넘었으니 독일 살이는 선수들이겠지. 물론 이 두 사람이 동유럽에서 온 하우스메이드, 가사도우미를 쓰고 있어서 독일 와서 화장실 청소란 한 번도 안 해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즉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리스크도 존재한다.
" 화장실 청소 한 번도 안 해봐서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 대답이 돌아올 확률이 제로는 아니다. 떨리는 순간이다.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버버리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 내가 진짜 괜찮은 세제 알아요. 스프레이 타입인데 이걸로 뿌리고 화장실 청소용 티슈로 닦아요. 이틀에 한 번은 해야지 직성이 풀려요. 독일 와서 아직 그 집 화장실 청소 한 번도 안 했어요? 이거 DM (독일 드러그스토어) 가서 당장 사서 해요. 화장실 청소를 하고 써야죠. 전 매일도 해요. "
아......! 이 분 화장실 청소 실행력이 나보다 강하다. 근데 나처럼 즐기는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 분 청결 강박이다. 공중 화장실도 잘 못 쓰는 그녀였다. 난 이런 타입은 아니다. 그럼에도 버버리녀에게 물어보길 정말 잘했다. 풍부한 화장실 청소 툴에 대한 정보의 소유자다.
벤츠녀는 버버리녀의 기운에 눌려 살짝 한 발짝 물러선다.
" 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하는 것 같아."
일주일에 한 번 하시나 보다. 그럴 것 같다. 아침마다 풀 메이크업하고 학교를 온 김에, 학교 로비와 카페테리아에서 최대한 시간을 끄는 그녀의 행동 패턴을 난 파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이를 학교에 내려다 주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그녀는 학교 주위를 어슬렁 거리거나 같이 쇼핑 갈 사람을 찾곤 했다. 2시 30분에 아이를 데리러 올 때 집에 들렀다가 온 것 같은 느낌인 적이 드물었다. 그녀는 화장실 청소에 관심이 없다. 몇 달 안에 나는 그녀가 주변 엄마들 사이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크로아티아 도우미를 수소문하여 만족하며 고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내 예측은 자리 깔아도 될 수준이다.
이 날의 대화로 나는 주재원 와이프들 또는 국제 학교의 다른 엄마들에게 화장실 청소에 관한 추가 정보가 필요하진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들과의 점심 자리에서 이런 말이 날아든다.
" 내가 진짜 여기 독일 와서 이런 화장실 청소 따위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에요."
나에게 한 말은 아니다. 이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낸 엄마는 자녀가 셋이었고, 그날은 어린 막내가 독일 유치원이 일찍 끝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식사자리에 데리고 온 날이었다. 셋째는 너무 이쁘다. 엄마도 눈이 동그라니 인물이 좋은 편이었는데 셋째는 엄마의 눈을 한 데다 생글생글 웃는 상이라 점심 자리의 다른 엄마들이 다 미소 발사였다.
그런데 막상 아이의 엄마는 표정이 없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도 싸늘하다. 몇 번 그녀와 마주쳤던 터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한 번 웃어주고 그 예쁜 아이에게 뭘 좀 줘볼까 하고 말을 건네 본다. 주변 엄마들도 다 이 꼬마의 점심으로는 뭘 줘야 하나 하며 호의적인데 막상 아이의 엄마는 팔짱을 끼고 앉아 아이를 째려보고 있다.
그리고 나온 말이었다. 화장실 청소.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나의 두 아이들도 울거나 울지 않거나 어쨌든 학교를 가서, 끝나는 제시간에 데리러 가면 되었다. 그래서 , 나는 주재원 와이프들의 이 점심 약속에 한가롭게 참석할 수 있었다.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면 엄마들과의 대화에서 기운이 쏙 빨리기 일쑤여서, 다녀와서는 무엇도 하기가 쉽지 않아 집에서 혼자 가만히 쉬곤 했었다. 그래서 약속 시간 30분 전까지도 내가 해야 할 일들, 예를 들면 화장실 청소나 청소기 돌리기, 장보기 따위를 부스스한 머리와 북슬북슬한 극세사 바지 착용을 하고 쉴 새 없이 해치우곤 했다.
내가 나 자신을 독일에 화장실 청소나 하려고 온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면, 날 좋고 음식도 맛있던, 아무 일도 없는 그 축복받은 날은 아마 가사노동 지옥 같았을 테다. 내가 유럽에 있던, 한국에 있던, 주재원 이든 아니든 그 어떤 날도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화장실 청소를 좋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풀 메이크업과 버버리 패딩으로 나를 세팅하기 30분 전에 찌른내 나는 변기를 새 변기로 새로 탄생시키는 노동을 하고 김 낀 거울을 호수처럼 반짝이게 만들어 보라. 나 자신이 위대한 사람으로 마인드셋 된다. 아닐 것 같은가? 한 번 해보시라. 장담하건대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