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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게 다 고맙다.

- 콜록콜록

by 호박씨

삶의 시간이 3개월 남으셨다는 폐암 말기의 시아버지를 뵈러, 내일은 부산으로 가야 한다. 남편은 일찌감치 가있는 상태다. 그러니 나의 콜록 거림도 아이들의 목 아픔도 잽싸게 나아야 한다. 정상 컨디션으로 뵈러 가야 한다. 전화로 아이들과 내가 콜록거리니 남편은 아버님을 뵐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 미안하지만 와달라고 한다. 연일 면회가 되지 않는 병동에 계신 아버님을 뵌 지가 어언 9개월 다 되어가니 말이다. 하루 만에 나을 독한 약을 지어와야겠다 싶어 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그제부터 심하게 콜록거렸는데, 병원 안 가는 게 몸에 베인 나다.


외국 살면 그냥 안 아픈 게 장땡이다. 그래도 나의 거주지는 상당히 괜찮은 수준이었다. 다른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 대비 말이다.

일단 한인 소아과가 차로 1시간 이내에 있다. 이건 정말 운이 좋은 거다. 한인 내과도 차로 30분 거리에 2개나 있다. 한인 치과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운전만 잘하면 아이 소아과는 40분 운전을 해서 잘 가면 된다.

문제는 나의 운전이다. 앞서 말했듯, 난 정말 운전이 젬병이다. 소아과 가는 길은 남편이 한 번만 같이 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이가 아플 때 옆에 있기는커녕 그는 늘 출장에 접대, 야근에 코빼기도 볼 수 없다. 본인 아플 때도 낑낑 거리며 출근하는데 말해 무엇하리.


큰 아이와 같은 반이었던 한국 아이 T의 엄마 H에게 병원 갈 일이 있으면 따라가도 되겠냐고 부탁을 했다. 문제는 이분은 공감의 기제가 1도 없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워낙 한인이 없기도 했지만, 하필 그분을 고른 내 안목이 문제다.

소아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로 빨리 가는 방법과 시골 밭길 국도로 천천히 가는 방법이 있다. H는 강남부터 홍대까지 매일 강변대로 타고 출퇴근하시던 워킹맘이라 , 아우토반을 날아다니시는 분이었다. 그날 이후에 알았지만 말이다. 내가 운전이 좀 미숙하다고 미리 부탁을 잔뜩 했는데도, 들어가자마자 1차선으로 진입하더니, 속도 제한 없는 아우토반을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아우토반1.jpg

H의 아우디 A8이 안 보인다.


나의 차는 2010년산 아우디 A3 였는데 내비게이션이 이런 스타일이었다.


네비2.jpg

그러니 차에 탑재되어있는 고대 신석기 스타일의 내비게이션은 사용이 불가했다. 오직 내가 믿는 바는 그녀의 벤츠 뒤통수인데, H는 한참 후에야 1차선에서 다시 4차선으로 나와서 갓길에 깜빡이를 켜고 나를 기다린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도 그녀에겐 공감의 유전자는 발현하지 않는가 보다. 본인 운전 자랑을 이번 기회에 하시려는 것은 설마 아닐 테지.

한겨울에 진땀을 흘리며 고속도로 나들목으로 나온다. 병원은 주택들 속 작은 건물 앞이라 주차 공간도 없다. 운전이 안 되는 내가 주차라고 잘할 리가 없다. 한참을 빙빙 돌아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의 마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두 아이와 병원에 가니, 그녀가 앉아 있다. 그저 무사히 안 죽고 도착했음에 감사하자.


첫 병원행에서 고초를 겪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밭길로 운전할 방법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구글 지도 보고 몇 번이고 병원으로 가는 길을 상상으로 운전해보았다. 여기서 가장 큰 난관은 이웃 마을 Kronberg에 있는 4차선, 나들목 10개의 라운드어바웃이었다. 처음 구글 지도에서 라운드어바웃을 발견하고는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운전을 하라고 만들어 둔 건지, 하지 말라고 만들어 둔 건지 헷갈렸다. 남편은 나가야 할 때 못 나가면 계속 돌면 된다고 했다. 계속 언제까지고 돌다 보면 나갈 수 있는 때가 오니 파이팅하라는 것이 그의 격려였다.

라운드어바웃3.jpg

만약 이 라운드어바웃을 무사히 통과했다면 정겨운 밭길 국도가 펼쳐진다. 문제는 20분이 넘는 이 국도에 주유소나 휴게소는커녕 변변한 건물도 하나 없다는 점이다. 노로 바이러스로 아이들이 한창 고생할 때는 차를 밭둑에 세우고 토하는 아이 등을 토닥여 주기를 몇 번이었다. 그래서 내 차엔 늘 비닐봉지와 물티슈, 물이 상비되어 있었다. 한국과 독일의 필수 예방 접종 항목이 꽤나 다른 편이어서 재독 초반에는 병원 갈 일도 많았다. 내가 독일 적응에 정신이 없어 아이들 컨디션을 제때 파악하지 못하는 때도 종종 있었다. 운전이 미숙하니 병원 가기를 미적대다 병을 키운 적이 많았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병원행이었다. 그 결과 나는 라운드어바웃 박사, 밭길 운전 전문이 되었다.


소아과 운영시간도 문제다. 병원들 대부분 일요일은 쉬며 토요일은 오전 진료만 하는데 아빠들과 같이 온 한인 아기들로 예약은 거의 불가하다. 주중에도 오전 진료만 있는 날과 오후 진료만 있는 날로 나뉜다. 예약은 흔히 3주 전에 해야 한다. 해가 100일 넘게 나오지 않는 겨울을 지난 습습한 봄엔 한인 아이들의 면역력이 뚝 떨어져 한 달 전에 예약하기도 힘들었다. 열이 펄펄 나는 날은 그저 속절없이 밤새 앓은 아이를 꽁꽁 싸매어 입히고 야외에 주차되어있는 내차의 시동을 걸어 데워둔다. 소아과 오픈 시간 40분 전에 출발하여 예약자가 안 오는 시간이나 우연히 비는 진료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대기실 안 의자에 누워 있곤 했었다.


어른 병원은 상황이 좀 나아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데, 도착하자마자 뜬소문이 돌아 그 병원 방문이 꺼려졌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주재원 와이프가 건강 검진을 했는데, 의사가 추행을 하여 당일 남편이 병원을 발칵 뒤집어 났다란다. 카더라 통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뉴스가 읽히지 않는 곳에서 작은 네트워크의 소문은 무엇보다 빠르다. 누군가의 일은 좁은 주재원 마을에서 순식간에 일반화된다. 한인 치과에서 마취와 충치 치료를 하고는 이튿날 전신마비가 와서 일주일을 독일 병원에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선택지가 없다. 의사가 한국인인 내과, 소아과, 치과가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한인 병원이라고 해도, 계시는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 선생님도 겉만 한인이지 교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이 통한다는 거지 정서는 전혀 상호 교환이 되지 않는다. 간호사도 한인이면 양반이다. 독일 간호사인 경우는 영어를 못 알아 들어서 독어로 전화로 예약이 힘들면, 방문해서 예약을 하고 진료일에 다시 가고를 반복해야 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는 약국이 있었다. 빨간색 약국 표시를 보면 부모님 그리고 나의 일터가 생각나 반가웠다. 그러나, 독일의 약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한국은 제네릭이 많다. 내가 진통제 게보린을 먹겠다고 한다면, 게보린과 같은 성분으로 이 오리저널 약을 그대로 함유한 복제약이 있어서 저렴의 가격의 선택지가 항상 있는 편이다. 독일은 오리지널만 약국을 채우고 있다. 원천기술이 독일서 발생한 약이 많으니 얼마나 독일은 약 사기 편하고 싼 약이 많을까 라는 생각은 순전히 착각이다. 아이들에게 늘 발라주던 작은 비판텐 20그램짜리는 정가가 6유로, 한화 8천 원이었다. 한국보다 적게는 10%, 많게는 30%까지 비쌌다. 게다가 약국서 근무한 나는 도매가에 약을 늘 공수해다가 썼으니 독일약은 더 비싸게 느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독일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동네 신문 사이의 약국 전단지를 유심히 보고 그 주의 Top-Angebote, 파격 세일을 꼼꼼히 체크하여 저렴하게 상비약을 챙겨둔다. 이번 주에 비판텐이 3유로구나 하면 사러 가야 하는 식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아이가 아프고 나까지 아파서 한인 병원을 도저히 갈 형편이 안 되는 어떤 급한 날에는 동네 약국서 바가지 아닌 바가지를 쓰곤 했다.


내 상태가 좋아서 운전을 하고 간다고 해도 죽는소리하지 않으면 약은 세게 처방해 주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 한인 선생님은 겉으로 보기에만 한인이지 교포가 대부분이라 그냥 독일인이라고 여겨야 내 속이 편하다. 아파 죽겠다거나 정말 센 약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는 이상 항생제는 턱도 없는 소리다.

" 정말 이 항생제를 자녀에게 먹이시길 원하십니까? "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약을 타야 하니, 내 시간과 돈을 들여도 내가 만족할 만한 처방전은 나오지 않는다. 처방 받아온 약을 먹어도 일주일은 꼬박 아프니 병원 안 가고 푹 쉬는 편이 나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아프면 그냥 집에서 쉬었다. 특히 내가 아프면 한국서 아버지가 싸주신 약을 먹으며, 한국 약이 약발 최고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 기술을 복제했을 법한 한국 약을 먹으면서 말이다. 우습지만 그리 되었었다. 아픈 상태로 일터와 학교에 나가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다니는 극 민폐인이 되는 나라였다. 아프면 고생이니까 말이다. 사보험도 아닌 병원 예약이 힘든 공보험이면, 치과 예약에 1년도 걸리겠다 했다. 충치가 심해져 이가 다 없어져서 막상 진료 예약한 날이 되면 치료할 이가 사라졌다는 농담도 독일인들 사이엔 있었다. 형편없는 독일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자조 섞인 농담일 것이다.

아프면 안 되는 나라 또 있다.


옷을 챙겨 입고, 1분 거리의 가정의학과로 가서 진료를 받는다. 대기시간 5분. 진료 시간 5분. 의료 보험이 되는 진료비는 아이들 둘의 것까지 해서 만 사천 원이다. 나와 비슷한 목감기를 앓고 있는데, 온라인 수업을 듣니라 아이들이 같이 못 온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이들 것 까지도 처방해주신다. 독일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를 진찰하시고 애들 상태를 문진하고 며칠 아팠냐고 물으시더니 척척 처방전을 주신다.

같은 건물 1층 약국서 낸 우리 세 사람의 총약제비는 만원이 안된다.

" 아이고, 셋이 다 아파요? 난리 났네. 엄마, 힘들겠네."

약을 건네는 약사님의 말씀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별 게 다 고마운 나다. 나이 지긋한 약사님이 약을 건네주며 힘들겠네라고 말해주시는 것이 고맙다. 어떤 독일 병원, 독일 약국에서 나의 힘듬을 물어봐주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허덕거리며 아픈 아이를 데리고 가도 진료받고, 약 받고 Danke, schon 당케 쉔 하는 것이 내가 하는 말의 전부였다.

" 사실은 어제 한잠도 못 자서요. 저까지 아프려고 하네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누구도 나에게 힘들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기회는 없었다. 내 집 앞 1분 거리에서 받는 약도 고마운데 위로의 말까지 들으니 세상이 고마운 것 투성이로 바뀐다. 식구들이 아픈 오늘, 내 나라에 온 지 만 1년 10개월 만에 나는 한국을 실감한다.

돌아오니 두 아이의 눈이 동그레 진다.

" 우리 약도 받아왔어? 엄마 나갔다 온 지 10분밖에 안됐어."

습관처럼 참았던 이틀이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이렇게 독일이 베여있는 나다. 언제쯤 독일로부터 헤어 나오려나? 그립지만, 힘들었던 그 나날들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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