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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이라 독

by 호박씨

너만 주는 거라며 힘주어 말했다. 독일에서 한국어 논술 과외라니, 지구 건너편에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사교육이 살아 꿈틀댄다. 지구 반대편에 살아도 우리의 불안함은 옅어질 생각이 없다. 돌아갈 날이 있다면 오히려 독일에서의 시간을 최선을 다해 즐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주재원이라면, 두 번 나오는 행운이 내겐 다신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이 마치 주재 마지막 일인 듯, 장기 여행자의 마음으로 재독 주재원 가정의 오늘을 실컷 즐겨야 하는 게 이치에 맞다.

너만 주는 거라는 그녀의 말에 알았다고 하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고 싶었다.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부모라는 이름을 걸고 이기적일 수 있다면 한 없이 이기적일 수도 있다. 내 자식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주재원 자녀로 대입을 맞는 경우, 서로 한국에서의 입시 조건이나 프랑크푸르트에서 구할 수 있는 수학 과외 선생님 정보는 절대 공유하지 않는다는 스토리를 들으면서 기가 막혔다. 마치 그 아이들의 대학 입학이 정해지기 했다는 듯 경쟁구도를 그려내는 사람들은 oo 엄마라는 이름이 붙은 이들이다. 그들의 대학 입학이 당상인가? 다 떨어지고 특례 재수를 할 수도 있다. 시험 당일날 컨디션이 최악이라, 또는 떨어서 떨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자식의 앞날이 제로섬처럼 남의 자식이 내 자식 자리를 앗아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단 말인가. 그렇게 폐쇄적으로 구는 이들은 반백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른의 막바지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결심은 저렇게는 살지 말자였다.

이런 나의 마음먹은 바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아이는 말이 더뎌 어린 나이에 언어치료를 받으러 다녔었고, 아이의 학교 적응이 걱정된 그녀는 아이를 1년 늦게 초등학교를 입학시켰다. 그녀에게 둘째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런 시간들은 지나가고 그녀의 아이는 국제학교를 잘 다니고, 뭐든 주는 대로 잘 먹고,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대자연처럼 밝고 맑았다. 그녀의 시계는 아이가 언어치료를 다니던 그 시간에 멈춰져 있는지라 재독 주재를 시작하자마자 국어 논술 과외를 찾아 긴 대기시간을 거쳐 아이에게 붙였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국어 과외 연락처였다. 긴 시간을 걸려 얻게 된 자리를 내게 준다고 한다. 내 아이에겐 꼭 필요한 것이니, 본인 아이 과외가 끝나는 그다음 회차부터 바로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끔 오늘 당장 연락을 하라고 거듭 당부했었다.


이기심. 이기심이란 모든 것의 순서에 있어서 나를 가장 먼저 둔다는 말이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내 아이를 최우선에 둔다면 그건 아이 또한 나에 속해있는 일부라는 인식이 깔려있다는 뜻이다. 아이는 나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나왔을 뿐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부모를 만나길 쉽지 않다. 나의 부모조차도 그들의 지붕 밑을 떠난 지 한참이 된 나를 여전히 그들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그들의 소유로 여기는 마음이 있을는지 모른다. 아이가 나의 것이라 생각하면 우린 부모라는 허울로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 있다.

아프리카 대지의 단체 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함께 식사를 하지만 얼굴을 맡대로 밥을 먹지는 못한다. 내가 먹고 싶은 양을 내 앞의 동료가 먹는다면 내 배가 고플 테니 말이다. 제한되어 있는 사냥감과 먹잇감이라는 야생의 환경은 제로섬이 통할런지도 모르겠다.

입시 자료를 공유하지 않으며, 좋은 과외 선생을 나누지 않는 폐쇄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oo 엄마에게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다. 무엇이 그리 불안한가? 당신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의 나라에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제로섬의 공식으로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게 아니다.


3.1 절이다. 고1이 되는 큰 아이는 3.1절에 누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유관순은 너 나이 만할 때 만세 운동하다가 맞아 죽었어."

"내 알 바 아님!"

맞다. 아이가 알 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꼰대처럼 나는 구역구역 아이에게 말한다. 오늘 아이 네가 누리는 이 안락한 나라는 자식이 감옥에서 죽어가는 순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어느 엄마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는 걸 말이다. 그 엄마는 아이를 세상에 내려놓았을 것이다. 만세 운동을 하겠다는 아이를 내 자식이라고 여기기보단 세상에 두 다리로 바람을 헤치고 서있는 인간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 밖에 아이를 내놓으려면 이기심부터 내팽겨 쳐야겠다. 이기심으로부터 독립만세를 외쳐야겠다.



사진: UnsplashMatt Ath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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