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온난화가 고마울 때도 있는 법이다.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에게 혹독하지는 않은 날씨이다. 이만하면 광장에 모일만 하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들이 조용한 데에 기가 막히다. 평소엔 그리도 글을 많이 올리던 이들이 어찌 이런 일엔 조용한지 배신감까지 느낀다. 사건 사고는 늘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글 쓰는 이들 중에 국가를 모독한 이에게 '님'이란 호칭을 붙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목소리가 큰 이들 중에서 자격이 없는 이에게 자격을 이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다. 신문을 읽으며, 블로그와 브런치를 읽으며 이름 석자를 되새긴다. 잊지 않아야지, 그들의 진짜 모습을. 기억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의 속마음을.
투표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국회의원이건 학급 반장 선거건, 대통령 선거이건 단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다. 머리가 굵어지곤 누군가에게 내 권리를 나눠준 적이 없다. 다른 이들이 나눠준 힘으로 '의원'.'장',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을 매일 마주한다. 종이 신문으로 그들의 이름과 행적을 마주하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부디 배신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엄마, 아빠를 배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엄마, 아빠에게 계엄령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전화를 한다. 아버지는 그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유튜브를 부지런히 챙겨보고 있고, 엄마는 누가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니 그가 제일 나을 수도 있다고 한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독일에서 한국의 탄핵 소식을 들으며 부모님이 우울해하던, 입맛 없어하던 시절을 기억하며 이젠 더 늙어 부모님이 입맛을 잃을 일이 없길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어찌 될라고 이렇냐?"
엄마, 이 나라는 엄마 같은 사람이 있어서 괜찮을 거야. 아빠, 이 나라는 아빠가 여기까지 살아온 바가 있어서 어떻게도 되지 않을 거야. 죽지 않고 살아남아 삼시 세끼 밥을 챙겨 먹으며 헐벗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건 '대통령님', '장', '의원' 덕이 아니다. 스스로가 다 부서지고 흩어질지언정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간 엄마 아빠 덕이다. 그리고 남편과 내 덕이다. 세상 걱정이 없다. 분노도 없다.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적이 없으며, 그들이 오늘을 뒤흔든다고 해도 우린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집을 나간 날이 계엄령의 밤이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집을 나가는 날을 잘 선택했다 싶었다.
"엄마, 내일 학교 안 가?"를 아이가 물어오던 순간에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잠자리를 만들고 얼굴까지 극세사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이가 집을 나가던 일요일부터 학교를 무단 이탈하던 월요일까지 모자랐던 잠과 신경 쓰면서 쌓인 피로 때문에 10시도 되기 전에 눈이 감기고 있었다. 큰 아이는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10시가 넘어서 왔고, 작은 아이는 큰 아이 때문에 며칠 공부를 못했다고 성질을 내며 카페에서 공부하다 10시 반이 다 되어서 집에 돌아왔다. 두 아이를 기다리고, 끼니를 묻고, 야식을 챙겨주고 소파로 파고들자마자였다.
"네가 일요일에 집을 나가서 참 다행이야."라는 말을 담요 속에서 숨죽여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우리로부터 이 평화를 앗아갈 수 없다.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겠다고 작정을 하고 훼방을 논다고 해도, 그 누가 와서 우리에게 강제로 목숨을 위협한다고 해도 일상을 훔쳐갈 수는 없다.
계엄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당선되기 전 "윤"을 마주쳤던 자리로 걸어갔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반해있던 그 시절, 힘겹게 두 아이들을 깨워 뒷산을 올랐었다. 매일 아침 질질 아이들을 끌고 미도 아파트 단지를 지나 법원 뒷산을 오르던 그 길에 그와 마주쳤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 시간을 떠올렸다. 서늘하던 그의 눈빛을 생각했다.
이 나라가 어찌 되려나 걱정하는 엄마와 아빠에게 무심하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내가 되었다. 계엄이고 뭐고 학교는 가는 거라며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게 오늘 한국을 살아가는 용감한 이의 모습이다. 출근을 하고,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어리석은 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짐에 손뼉 칠 수 있는 우리가 지금의 한국이다. 그러니 부디 걱정하지 마오. 우린 괜찮을 거니까요. 언제나 그렇듯 빌런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고, 눈치 빠른 호박씨는 빌런을 알아차리곤 한다. 글에 기대어 사는 게 이리 좋은 날이 있다. 실컷 하고 싶은 말을 토해놓을 곳이 있다.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