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엔 위로를 해.

by 호박씨

출근하기 싫은 날씨다. 6시 30분에 일어나 큰 아이가 아침을 거들어주고는 베란다 밖 날씨를 본다. 간을 본다. 내 기분을 날씨에 맞춰드려야 하는 건데 날씨가 내 기분을 맞춰줬으면 싶은 거다. 독일에선 익숙해져야만 했던 날씨. 마치 옮겨 심어진 듯 적응해야만 했던 공기의 냄새와 습도가 떠오른다. 출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언제나 내 속에 있었던 걸 무엇이라고 탓하고 싶은 거다. 뭐든 누구든 습관처럼 하늘을 보고 뭐라 하며 하릴없이 우울해지고 무엇도 할 수 없는 듯 눈물 한 방울 버릇처럼 흘려보는 거다. 과거에 나는 그러했다. 그렇게 지냈었다. 뭐 대단한 거나 돼야 하는 거처럼 용감하게 집 밖을 나섰다가 이내 징징거리고 훌쩍이며 돌아왔다.

흐린 날의 놀이터였었다. 동생이랑 놀이터에 나갔다가 오면 울고 돌아왔다. 할 말은 산더미인데 말이 안 나오니 분해서 울었는데 울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한테 혼이 나더라. 사회생활이 쉽지 않고 회사가 어려웠던 아빠를 남편으로 데리고 살던 엄마에게 나는 그러면 안 됐었나 보다. 그래서 책을 끼고 집에 있었다. 책도 보고, 비디오도 보고, TV도 끝도 없이 보았다. 그렇게 혼자서 외로움은 곱씹고, 칼도 갈아보았다.

흐린 날은 혼자여야만 한다. 흐린 날은 꼼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쨍한 날은 쨍한 날대로 열받지만, 흐린 날은 적당히 흐려야지 지나치게 흐리면 날씨에 홀린 듯 무엇도 할 수가 없다. 우울함이 커피처럼, 달콤함처럼, 풍미 좋은 와인처럼 내게 와 들러붙는다. 그야말로 내겐 매력적인 친구인 거다. 자기 연민을 하기 좋고, 내가 나를 불쌍하고 어여삐 여기기 좋은 기분을 북돋워주는 거다. 챙겨줘야 할 배려해야 하는 타인, 그 누구도 싫다. 오로지 사랑하는 나를 끼고 싸고도는 날, 흐린 날이다.


새 직원이 2명이나 들어온 월요일이었다. 월요일로부터 밀려 밀려온 일이 산더미인 수요일이었다. 이런 날은 이불 뒤집어쓰고 하루 종일 자야 하는데. 하루 종일 혼자이고 싶은데.... 저혈압이라 머리도 지끈해 오는데, 업무 생각을 하니 더 나가기 싫었다. 나가기 싫은 만큼이나 몸을 서둘러본다. 어떻게 해서든 질질 스스로의 머리 끄덩이를 잡고 집 밖으로 끌어내려면 출근하지 않을 수 있는 변명을 머릿속으로 써 내려가는 단계부터 막아야 한다. 생각이 없도록 몸을 부산히 움직였다. 작은 아이를 깨워놓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먹고 싶지도 않은 어제저녁 반찬으로 도시락을 쌓고 최대한 편안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잘했어! 이제 출근해서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말아야지 굳은 결심을 하고 말이다.



"호박씨님 바쁘세요?

나보다 천만 배 흐린 얼굴을 한 H가 펜과 노트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한차례 뿌릴 듯한 그런데 뿌리지는 못하는 무겁디 무거운 하늘 같은 표정을 하고 그녀가 서있다. 저 얼굴, 저런 표정을 잘 알지. 작년 요맘때쯤 거울을 보며 화장실서 또는 사무실 복도에서 눈물을 눌러 담던 내 표정이 딱 저러했을 것이니 알고도 남는다.

사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H의 문제상황을 들어주었다. 2단계 정도의 대응방안을 정리해 주니 그녀가 차분해진다. 무거워진 얼굴이 풀리고 울음이 터질듯한 표정도 가벼워졌다. 물론 문제 해결은 못해주지만 어쨌든 나아가야 하니 움직여보자며 보고하고, 전화하자고 그녀를 독려해 보았다.

10여분 후 H의 문제는 사라졌고 H는 사내 메신저로 내 덕이며 몇 번이고 감사하다 했다. 내가 한 게 없는데? 뭘 했다고? 고민 들어줬고 대응방안 이야기해 준 게 다인데?


흐린 날 그 누구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나는 쓸모없다 생각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는 가치가 없으니 기꺼이 혼자 있겠다 했다. 아니다. 정답이 아니었고, 법칙도 아니었다. 그녀는 40년 넘게 내가 지켜온 법칙을 산산이 부서 줬다. 업무시간 내내 찌부두한 얼굴로 걱정과 불안과 근심의 삼합의 표정으로 업무에 임한 그녀였지만, 내게 사내 메신저로는 세상없는 감사를 표했다. 영혼이 없는 메시지와 영혼이 있는 메시지를 잘 구분하는, 나름 브런치 작가인 나로서는 그녀의 감사가 진심이다.

앞으로 흐린 날은 침대 속 또는 따뜻한 어느 방구석에서 스스로를 친구 삼아 자기 위안이나 하면서 살지 않으리. 호박씨의 흐린 날 서사는 다시 쓰였다. 온전히 내게 몸을 기대 그녀가 겪는 어려움에 도움을 요청했다. H덕분에 이제 내 흐린 날은 어제와는 전혀 다르다.

내일로 가열하게 일하러 가야지. 모레도 그녀에게 힘이 되기 위해 일해야지. 글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 돈 벌러 집을 나서야겠다.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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