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딸, 생일 축하한다."
아침부터 엄마의 카톡. 제일 먼저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
세상의 모든 이들의 생일에는 엄마의 산고의 시간이 어려 있다. 엄마의 산고 따위는 잊고 늘 생일 이면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들 무엇을 하고 노나 생각하기 바빴고, 남자 친구에게 얼마나 괜찮은 선물을 받는 가에만 집중하면서 살아온 나다.
이제 나는 내 생일에는 엄마에게 제일 먼저 전화하리라 또는 아이들의 생일에는 아이들에게 또는 남편에게 무사히 출생의 과정을 지나가 고맙다는 말을 듣고야 말리 다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내 생일이 왔다.
"너네 딸한테 어제 엄마 미역국 좀 끓여 주라니깐 못한다고 하더라."
" 엄마는 그걸 왜 작은 애한테 이야기해? 큰 애한테 말해야지?"
엄마는 솔직히 차별이다. 몇 번을 말해도 엄마는 바뀌지 않는다.
엄마에겐 첫 손주이고, 종손 맏며느리인 엄마에겐 없는 아들이며, 육아가 낯설어 엄마에게 매달렸기에 엄마가 정성을 많이 들인 것이 아들 녀석이다. 엄마는 내가 그만 좀 하라고 하는 순간에는 내가 언제 그랬냐며 작은 애에게 잘해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또 어느샌가 제자리이다.
시어머니는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먹으면 한 해가 복이 있다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악착같이 남편과 아들, 딸의 생일 아침이면 미역국을 끓인다. 나의 생일도 복은 받고 싶은데 내손으로 끓여 먹으려니 몹시 싫다.
독일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내 생일이건 그의 생일이건 그는 잘 해내고 싶은 이 주재원이라는 기회에 그의 최선 120% 발휘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일하지 않는 날에는 유럽 온 가성을 높이기 위해 여행을 갔다. 그러니 나의 생일은 늘 까맣게 잊혀 지곤 했다.
생일의 불똥은 남편에게 튄다. 나는 생일날도 어김없이 차린 아침밥을 먹고 있는 남편을 빤히 쳐다보며 엄마에게 말한다.
" 나중에 와이프 생일에 미역국 끓여 주려면 지금부터 버릇 좀 들여야 하니까, 엄마가 큰애한테 있다가 문자 좀 해. 작은 애 그런 거 시키지 좀 마."
엄마는 사위에게 미역국 끓이란 말은 못 한다. 엄마의 남편에게조차 제사, 김장은 물론이거니와 집안일에서조차도 도와달라고 하기 구차하다는 핑계로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아 온 엄마다. 당연히 사위에게도 무엇을 하라거나, 뭘 해달라는 말은 입도 뻥긋하지 않는 순한 장모님이다.
주재원 사회는 사실 좁디좁다. 주재원 와이프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사실 남편 회사 이야기는 어지간해선 꺼내지 않는다. 얽히고설킨 다리 건너면 연이 닿아 버리는 좁은 꿀벌집 같은 공동체다 보니 남편 이야기는 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분 처음 만나 자마 자부터 남편 자랑이시다.
" 남편 들어오고 저는 6개월 있다 왔어요. 컨테이너 짐 다 풀어놓고, 제 핸드폰이랑 차 해놔야 독일 올 거니까 알아서 하라고 해뒀죠. 그랬더니 다 해뒀더라고요, 글쎄."
국제 학교 입학 첫날 얼굴을 봤던 이 분은 나의 큰아이와 같은 학년에 작은 아이가 있는 엄마다. 전직이 스튜어디스라 목소리도 참 나긋나긋하니 듣기 좋다. 가만히 듣다 보니 자랑이었다. 자랑은 돈 내고 하는 법인데, 이 분은 자기 자랑과 남편 자랑을 내 집 식탁에서 내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하고 계신다.
그녀가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 식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때에 우리 집에 있던 유일한 가구다. 컨테이너 짐이 도착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이삿짐이 도착하기 전 잠시 써도 된다며, 법인장님이 더 이상 쓰지 않고 보관해두신 낡은 식탁이다. 남편 차에 실어 들고 와 한 달여 가량을 사용한 식탁으로, 이 식탁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박스를 뒤집어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날 왔으니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텅 빈 우리 집일지언정 학교에서는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집 중에 가장 가까운 집이기에 ESL 설명회가 끝나고 우리 집에서 커피 한잔 하자고 청했다. 내가 먼저 청한 것이니 남편 자랑이 늘어진 그녀를 탓할 수는 없겠다.
내 핸드폰을 개통하는데 약 한 달가량이 걸렸는데 그 한 달 동안 나는 한국에서 로밍해간 핸드폰으로 그 시간들을 버티고 있었다. 차는 물색 모르고 내가 한국서부터 필요 없다고 했다가 방향을 선회하여 차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었다. 비싼 국제 학교도 수업일수 걸리는 것도 없는 아이들이야 하루라도 빨리 다니면 될 듯하여 남편과 같이 독일에 입국한 것이었다. 모든 사정과 일정들은 ,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생활의 난처함과 불편함이 나에게 다가와도 이것은 그가 세팅한 것도,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만난 지 하루가 채 안된 그녀의 한, 두 문장에서 마음이 몹시 쓰리다. 마치 스위트 한 남편 테스트에 남편들을 모두 세워 두고 1등으로 그녀의 남편에게 시상식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 남편은 무대 뒤 가까이 제일 끝에서 꼴찌를 한 듯하다.
" 생일에는 남편이 미역국 끓여줘요. 제가 요리를 잘 못해서, 남편이 주말이면 거의 요리하니까 미역국은 잘 끓여요."
또 다른 그녀는 워킹맘으로 고생 고생하다 독일에 온지라 늘 나에게 독일에서의 시간은 휴가 같다 했다. 늘 까칠하게 투덜거리는 나에게 긍정적으로 해외 생활을 바라보는 이란 저런 모습이군 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녀다. 그런데 이 분 또한 남편 자랑이 늘어진다. 나는 듣고 있기가 힘들다. 늘 요리는 내 담당이다.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를 시작할 때 라면도 잘 못 끓이던 나를 남편은 가끔씩 떠올리며 껄껄 대곤 한다. 요리는 전적으로 나의 일이다. 그러니 남편은 미역국을 끓이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해 그에게 바란 적이 없다.
남편이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 주다니 문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녀도 나와 나이가 같고, 그녀의 남편은 내 남편과 나이가 같다. 그런데 이 부부는 이렇게 지내는구나 싶다.
" 나도 미역국 좀 끓여줘."
용기를 내서 말해보니 남편이 말한다.
" 그러면 우리 엄마가 속상할 텐데. "
말하지 말 것을 싶다. 어쩌겠는가? 이렇게 키워진 그다. 이렇게 지내온 그다.
" 아들아, 미역국 끓여라."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려주려고 신이 나에게 준 것이 자식이라고 한다. 엄마에게도 그럴 테다. 남편에게 도와달란 말 없이 척척 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사는 우리 엄마에게 나는 모진 소리를 해댄다. 아빠가 저렇게 된 것은 엄마가 도와달라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말이다. 결국 혼자서 다해놓고 고된단 말은 나에게는 하지도 말라고 해버리고 만다. 아들은 스위트 한 남편 대회에서 1등 할 수 있을까? 아들이 결혼을 한다면 말이다. 흐린 어느 날, 나의 며느리가 다른 부인네와 커피타임을 갖는다. 그리고 그녀는 뿌듯하게 말한다.
" 내 생일에 남편이 끓여주는 미역국은 왜 이리 맛있나 모르겠어요."
그럼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할 테다.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대신 그녀는 행복했으면 한다. 아들아, 맛있게 미역국 끓이는 비방을 전수해주마. 내년 엄마 생일부터는 연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