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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보다

by 호박씨

컴퓨터 자판 오른쪽에는 Num Lock 버튼이 있다. 넘락 버튼을 누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넘락 버튼을 누를 때마다 손은 첫회사 사무실로 나를 데려다준다. 넘락 버튼을 빛의 속도로 누르게 되었을 때, 지나가던 부장님의 칭찬을 들었다. 그것이 2년 남짓의 회사 생활에서 유일하게 들었던 찬사였기에 잊을 수 없다.


패션업에 종사하고 싶었다. CEO 면접에서 밝힌 포부에 CEO의 눈빛이 달라진다. 합격을 예감했다. 의류학과는 없는 작은 규모의 대학을 다녔고, 전공은 의류학과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CEO는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었다. 전공이 동일하니 더욱 마음에 들어 했을지도, 면접에서의 포부에 동감하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은 옳지는 않았다. 의류학과를 나온 여대생들은 사원으로 신입을 시작했으며, 남대생들은 군대 복무와 상관없이 주임이라는 임무로 시작해 차량 지원을 받으며 원단을 띠러 다녔다. 여대생들도 운전은 할 줄 알았으며, 그들은 4년을 옷만을 생각하며 지냈을 터이다. 여자 신입이 3년여를 다니면 주임이 되었던 것 같다. 3년을 내리다녀 주임이 된 여자 직원의 숫자가 많지는 않아 기억이 흐리다.


4년을 경영학과에서 공부했고, 옷의 디테일이라고는 갓 난 병아리보다 더 아는 것이 없었다. 디테일에 구멍이 나니 함께 일하던 주임이 버거워했다. 뭉이라고 불렸다. 평소에는 사고뭉치의 뭉이라고 늘 불려졌다. 그러다 뭉 신입은 대형 사고를 냈다. 대량 오더의 Mock up 목업 작업이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목업이란 제조업과 디자인 분야에서 디자인이나 장치의 스케일 모델 또는 풀사이즈 모델을 가리킨다. 그렇다. 그 목업은 괌 공장에서 만장을 찍어낼 예정이던 NBA 올스타 농구복이었다. 100장의 목업에 들어가는 올스타 고무 라벨은 올바른 위치에 달려있지 않았다. 그날 혼자 100장의 고무라벨을 샘플실에 앉아 모두 뜯었다. 샘플실 사장님께 울며 불며 매달려 겨우 그다음 날 라벨 위치를 수정해 목업을 완성했다.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보다 눈물을 쏟았다. 목업과 작지라는 말에 대한 자막이 화면 왼쪽 아래에 뜨자 눈물이 나온다. 작지란 작업지시서를 말한다. 만들고자 하는 옷의 디자인을 1차 샘플로 만들려면 샘플실에 보낼 작업지시서가 필요하다. 작지를 그리기 어려웠다. 쉬워지려고 하는 순간 사고가 났다. 더 이상 작지를 그리는 일은 주어지지 않았고 숫자를 입력하는 회계일이 주어졌다. 그간의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 두 번째 기회가 새겼다. 기회는 기회로 기억되지 못하고 실패로 기억된다. 그래서 넘락 버튼을 바삐 누르지 않아도 되는 브런치로의 로그인에도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손의 기억은 실패를 불러일으킨다.


드라마가 위안이었다. 밤을 새워서 드라마를 보고 낮이 되면 대만인인 Mandy와 아시아계 미국인인 Trang과 드라마 이야기를 나눴다. 잘 아는 주제에 대한 영어 대화는 통제가 가능하다. 대화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대화의 시작을 잡고 나갈 수 있기에 좋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드라마는 위안이었다.

바야흐로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의 전성시대였다. 오징어 게임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은 안다. 맨디도 트랭도 한국 드라마에 열광했다. 맨디 주변 중국인들과 홍콩인들을 맨디가 소개해주었었는데, 그들 또한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면 표정이 달라졌다. 분위기도, 영어도 매끄러웠다.


달밤에는 향수병을 달래주었다. 트랭은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그리워했는데, ' 상속자' 속 캘리포니아 해변과 아몬드 농장을 보며 감탄했다. 트랭 또한 상속자들을 보며 향수병을 혼자 달랬다. 밤 한가운데 그녀 혼자만의 드라마 시간을 엿볼 수 있었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던 차라 반가웠다.

칼로리는 낮고 질리지 않는 맛을 가진 프레첼 한 봉지를 들고 온다. DM 드러그 스토어에서 파는 유기농 프레첼 스낵은 단돈 2유로, 2500원이다. 한 봉지면 그날 밤의 드라마 여정을 펼칠 수 있다. 넷플릭스가 없었고 넷플릭스 출시 즈음에는 한국 드라마도 없었다. 헐벗은 여자들이 팝업으로 뜨는 불법 유통 드라마 공유 사이트에 들어간다. 교포나 주재 생활이 긴 분들에게서 간신히 얻은 주소다. 팝업이 덜 뜨고, 업데이트도 빠른 사이트를 찾기가 쉽지 않다. 검색과 조언의 힘으로 알아둔 사이트에 접속한다. 공유는 불법이지만, 향수병 치료는 합법이라고 변명해본다. 서울이 나온다. 여의도 포장마차인가? 한강 다리인가? 전업 주부가 되기 전 서울에 발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눈에 익은 장면들이 가득하다. 밥 먹는 장면은 함께하고 있는 프레첼을 구박하게 만든다. 넌 왜 이리 단단하고 밍밍하기만 하니? 배은망덕한 발언이다. 내일 밤이면 다시 프레첼 한 봉지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을 것이다.


드라마가 없었다면, 불면증도 생기지 않았을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한 질문과 비슷하다. 서울과 한국 생각이 나서 잠을 못 이뤘을 수도 있다. 낮 동안에 받은 영어 스트레스에 성인의 한국말이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았고,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를 보다 수면시간이 줄었다. 드라마를 원망하진 않는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 그래서 오늘도 지헤중을 틀었다. 위안이 될 것이라 짐작했다.

지금은 아니다. 이곳이 독일이 아니기에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쏟는다. 태양의 후예에 나왔던 같은 송혜교인데 이번에는 위로가 되긴커녕 존재감이 없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목업과 작지, 샘플실이다. 눈물이 쏟아진다. 열정과 실패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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