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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톨렌의 신화에는 역경이 필요하다.

by 호박씨

이 외국인은 한국에 산지 4년 차 즈음에 한국 가정집 김치를 먹게 되었다. 이 가정집 김치는 집에서 담근 액젓과 손수 닦아 방앗간에서 빻아온 고춧가루로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식구들만 먹다 점차 원하는 이가 늘어 가정집 주변 지인들에게 아름아름 소량 판매까지 하게 된다. 4년을 살다 보니 숨은 장인도 알게 되어, 그는 진짜 한국을 맛볼 기회를 갖게 된다.

자, 이제 외국인이란 단어에 호박씨를, 김치라는 단어에 슈톨렌을 넣어보자. 그럼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 슈톨렌을 만난 곳은 Edeka 슈퍼였다. 슈퍼 통로를 따라 슈퍼 맨 안쪽의 끝인 정육점에 못 미쳐 행사 상품 매대가 있다. 계절별 행사를 준비하려면 철철이 매대를 살펴야 한다. 한국처럼 다양한 유통 체인이 존재하지 않는 독일에서는 철이 지난 물건을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두 달 전부터 행사 매대는 슈톨렌과 시나몬 과자 따위의 크리스마스 디저트로 가득한데, 크리스마스 다음날이 되면 이들을 구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열상품을 전면 교체하여 다음 계절 행사를 진열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빵을 사려면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

매대에는 슈톨렌이 산더미다. 10종이 넘어 보이는 브랜드에, 사이즈도 250그람부터 1킬로까지 다양하여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고민이 된다. 슈퍼의 슈톨렌은 더 이상 손으로 만들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만든 원래의 형태를 갖고 있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타원형 덩어리가 슈가파우더 뭉치로 덮여있다.

한국인의 기준에서 본다면 제품의 외관이 가격 대비 소박하다 싶겠다. 흔히 크리스마스 케이크이라 함은 파리*** 냉장 쇼케이스 속에 진열되는 것을 말한다. 파티시에의 노동력이 묻어나는 정 원형의 케이크 위에는 섬세한 크림 장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슈톨렌들은 덩어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얼마나 맛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투박한 것이다. 가격에 합당한 노동력이 투입되어있는지 확인하긴 어렵다. 맛도 사서 먹어보는 방법뿐이다. 포장지에 쓰여있는 모객의 단어는 'Das Original' 우리가 오리지널, 'Seit 1474' 1474년부터 만들었음 정도의 글씨가 전부다. 참으로 독일스러운 슈톨렌이다.


그래서 슈톨렌을 고르는 할머니를 살폈다. 할머니가 젊으셨을 적에는 슈톨렌을 크리스마스 두 달 전부터 준비했을 것이다. 슈가 파우더 옷 속에 숨은 재료들은 1년에 걸쳐 준비할 것들이다. 말린 포도, 크랜베리, 설탕 절인 레몬은 봄과 여름부터 그 쓰임을 계획해야 한다. 아몬드 페이스트 Marzipan과 버터는 할머니의 어린 시절에는 크리스마스에만 허락되는 호사였을 것이다. 슈톨렌의 마지판과 버터 함량은 밀가루보다 높다. 할머니는 250그람, 소포장을 망설임 없이 집으신다. 매년 같은 브랜드를 사시겠지, 다 먹어보셨겠지 싶어 할머니를 따라 사 본다.

크리스마스에 모인 식구들이 한 달을 두고 먹는 것이 스톨렌이다. 버터와 아몬드의 함량으로 독일의 주식인 브로첸 ( 바게트와 비슷하다) 보다 무겁다. 얇게 썰어 끼니마다 한 개 정도 입가심으로 먹는다. 독일에서 안주인의 음식 솜씨는 디저트로 결정된다. 명절이라 식구들이 모인 자리, 끼니때마다 디저트를 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슈톨렌은 지혜로운 입가심이다.

그런데, 이 슈톨렌이 별로다. 상온에 있는 케이크이란 개념이 낯설어서일까? 할머니의 기억 속 슈톨렌 맛과 2000년대를 사는 이의 슈톨렌에 대한 기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진정한 슈톨렌을 먹겠다며, 맛있는 Das Original 오리지널을 구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아들을 독일 야구단에 넣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아들 친구들은 시립 축구 클럽이나, 농구클럽에서 활동하며 국제 학교 학생임에도 독일을 즐기고 있었다. 부러웠다. 아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만들어줘야겠다. 몸싸움이 없는 야구가 아들에겐 제격이다. 야구 경기 관람이 남편의 오랜 취미라 야구는 아들에게도 친숙하다. 아이들이 걷기 시작할 때부터 남편의 취미를 공유하고자 야구장에 함께 가서 치킨을 뜯었던 한국의 추억도 있었다.

국제 학교에도 야구팀은 있다. 미국계 국제 학교니 야구팀 규모도 제법 된다. 문제는 국제 학교는 6학년부터 스포츠 클럽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라 기회다. 주변 친구들은 현지 스포츠 클럽에서 활동하며 독일어를 배워나갔고, 독일 아이들과 교류하는 듯해 보였다.

국제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Bad Homburg에 위치한 야구 클럽에 메일을 보내보았다. 영어로 메일을 쓰고 구글 번역기를 돌려 독일어로 동일한 내용을 덧붙였음에도 영어로 답이 온다. 시작은 좋았다. 막상은 독일인 투성이었다. 국제 학교에서 온 미국 소년들이 에이스로 자리 잡고 있긴 했으나, 이 미국 소년들의 아버지는 알고 보니 독일인이었다. 국제 학교라는 인큐베이터가 없었다면 손짓, 발짓으로 독일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렸을 것이다. 재독 4년 차인데 갓 독일에 온 듯 야구 클럽에서는 새로운 일들이 계속 생긴다.


남편과 냉전 10일째였다. 밧홈북 야구단은 연령별로 어린이팀과 주니어팀, 성인팀으로 구분된다.

"여느 크리스마스와 다름없이, 주니어팀 막시무스네 슈톨렌이 돌아왔습니다. 주문 메시지 주십시오"

어린이 야구팀의 소통 창구는 What's app이다. 독일어로 온 메시지를 구글 번역기에 붙이니 슈톨렌 주문이다. 앞에 붙은 ' 여느'라는 말에 시선이 꽂힌다. 막시무스네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야구팀에 슈톨렌을 제공했다. '동네 김치 장인이 김장철에 올해의 김치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의 독일 버전이다.


막시무스의 엄마로 추정되는 이에게 번역기를 돌려 공든 독일어 주문을 넣었다. 가격은 슈퍼와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만들 수 있는 수량이 한정되어있다고 하니, 홈메이드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런 슈톨렌이라면 한국의 엄마에게도 보내줘야 한다. 국제학교 친구 엄마들에게도 나눠줘야겠다. 넉넉히 주문을 넣었다.

주문은 들어갔는데 픽업 오라고 하는 시간은 저녁 6시 야구클럽단 연례 회의다. 독일어로 하는 회의라면 시작하는 시간에 가서 슈톨렌만 받아와야겠다.

구글맵을 보니 회의장은 아들이 종종 가던 야구 연습장 어디쯤으로 추측된다. 냉전만 아니라면 남편에게 부탁하고 싶다. 밤 시간 운전도, 주차도 자신 없다. 그럼에도 시도했다. 진수를 맛보려면 리스크라는 향신료가 빠지면 안 된다. 신화의 스토리에 역경이 빠질 수 없다.


칠흑의 어둠이 깔린 6시다. 딸을 뒷좌석에 태우고 갔다. 미안해, 딸. 너를 리스크가 담긴 스토리에 초대한 것을 사과한다. 구글맵은 우리를 운동장 건너에 안내해주었다.

' 여기 주차하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면 클럽 회의장이야.'

구글맵은 독일의 겨울밤을 모른다. 운동장은 라이트 없이 텅 빈 넓은 들과 다름없다. 핸드폰 조명에 의지해 안개 낀 6시의 들판을 건너가라고 구글맵이 일러준다. 멀리 보이는 흐릿한 불빛이 회의장이겠거니. 불빛을 바라보며 막시무스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나 회의에 못 가게 되었어. 혹시 슈톨렌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

얼굴도 모르는 야구클럽 소속 학부모에게 차마 회의장을 찾지 못한단 소리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답이 왔다. 막시무스 엄마는 답장도 금방이다.

" 응. 내일 아침에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집 주소는 블라블라야."

블라블라가 어딘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집은 어디라도 찾아갈 수 있다.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차 안에서 꼼짝 않고 무서워와 깜깜해를 연발하던 딸아이에게 큰소리를 쳐본다.

"딸아, 엄마가 세계 최고의 스톨렌을 내일 구해올게."

"스톨렌이 뭐야?"

" 응. 스톨렌이란 말이지. 블라블라 블라야."

곧 슈톨렌 박사가 될 것 같다.


다음 날, 막시무스네 집을 구글맵에 찍어보니 길에 다니는 차를 찾기 힘든 주말 아침 시간임에도 20분 넘게 걸린다. 여전히 안개 낀 국도를 헤치고 슈톨렌을 향해 운전한다. 야구클럽이 있는 밧홈북의 동쪽을 지나 한참을 더 가니 올드타운이 나온다. 슈톨렌 장인의 주거지와 어울린다. 올드 타운이라 막시무스의 집 앞은 비좁아 주차자리가 없다. 5분 정도 떨어진 공터에 주차를 하고 올드타운의 돌길을 걷는다. 아침 안개에 젖어 반들거리는 돌길을 걸으니 습기 가득한 아침 공기가 폐를 채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도착했다. 독일 살이 4년이 넘어가니 이런 일도 해낸다 싶다. 슈톨렌 맛이 별로여도 괜찮겠다. 이 여정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느덧 막시무스네 집 앞이다. 벨을 누르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문을 열고 나온 막시무스의 엄마는 나이 든 금발의 독일인들에겐 흔히 볼 수 있는, 백발에 가까운 금발의 소유자다. 그녀를 따라 좁은 층계를 올라 주방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슈톨렌만 받아가도 되는데 그녀는 나를 주방으로 이끈다. 전형적인 독일 집은 이렇게 생겼구나. 180이 넘어 보이는 금발의 막시무스와 그녀의 남편이 주방 한편 작은 식탁에서 마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그녀는 호일에 싸인 슈톨렌 더미에서 5개를 꺼내온다. 얇게 잘라서 먹어야 하며, 자르고 나서 다시 호일로 꼼꼼히 싸 둬야 수분 증발을 막는다고 했다. 보관을 잘하면 2달을 상온에 두고 먹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독일인의 일상을, 평범한 독일을 보여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진짜 독일은 여기 있었다. 그녀가 영어를 하지 못하고, 나는 독일어를 말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녀에게 감사를 해야 할까?

" 이 슈톨렌들은 한국으로 보낼 거예요."

나는 핸드폰에 영어로 메시지를 쓰고 번역기를 돌려 그녀에게 독일어로 이 문장을 보여주었다. 슈톨렌 값은 이미 이체하였으니, 그녀에게 돈을 내미는 것도 어색하다. Danke schon. Thank you very much를 연발해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막시무스네 집과 막시무스 엄마의 진짜 독일은 해외 EMS와 스토리를 타고 한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해줌으로써 의미를 부여했다. 그 순간으로써는 최선이었다.

그녀에게 전해졌을까? 그녀에겐 매해 반복되는 일상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새로움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기회의 제공자는 나의 벅참을 느꼈을까? 궁금하다. 12월 14일 지구 반대편 독일에서 막시무스 엄마는 올해도 슈톨렌을 만들고 있으려나.

그녀의 슈톨렌 맛은 최고였다. 아직 어디에서도 그 슈톨렌 맛은 찾지 못했다. 2달은 먹을 수 있다고 했으나 우리 집 아이들은 3일 만에 해치웠다. 슈톨렌을 얇게 썰어먹는 빵이라 부르는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막시무스네 스톨렌 맛에 대해 이야기한다.


P.S 막시무스는 진짜 이름이 아님을 말씀드린다. 이름을 잊었다. 흔한 독일 청소년의 이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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