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좋아.
요새 엄마의 라면 인심이 후하다. 독일에선 라면 많이 먹으면 아토피 심해진다고 그렇게 못 먹게 말리더니 한국 와선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 다. 오늘은 온라인 수업이다. 엄마는 오전 내내 없는 듯이 조용하다. 타닥타닥 타타타. 타자 치는 소리만 간간히 들린다. 수업 시작이 9시이고 오전 수업이 12시 10분 정도에 끝났으니 엄마는 3시간을 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이럴 때 점심을 라면으로 먹자고 하면 어떨까?
"엄마, 나 배고파. 점심시간이야."
" 응."
엄마의 음량으로 미루어 보아 글쓰기에 집중한 엄마는 내 말을 잘 못 들은 것 같다. 기회다.
" 엄마, 점심 라면 끓여줘."
"응."
역시 나는 머리가 좋다. 엄마가 라면을 순순히 끓여주니 이상하기도 하다. 우리 엄마가 바뀌었다.
" 엄마, 요새 라면 왜 이렇게 자주 끓여줘?"
" 독일에서보다 라면 자주 먹지?"
" 응. 나는 엄마가 라면 자주 끓여줘서 요새 좋아."
" 아들아, 코로나라 삼시세끼 하니까 엄마가 힘들어서 자꾸 라면 끓여준 거거든. 근데 라면을 먹어도 네 아토피가 괜찮더라고. 그래서 마음 놓고 끓여주고 있지."
" 아토피는 엄마 라면이랑 상관없어. 독일 우리 집 숲 공기가 맑았잖아. 그래서 이제 나 아토피 없어. 근데 엄마가 요새 밥을 많이 해?"
엄마가 나를 쳐다본다. 엄마는 섭섭해하는 눈치다. 엄마가 밥을 많이 하는지는 나는 모르지! 나도 엄마한테 섭섭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엄마가 나 몰래 라면 먹은 것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나는 독일에서 주재원 가족이었다. 독일 주재원 어린이의 하루를 지금부터 보여드리려고 한다. 한마디로 3개국을 넘나드는 하루라고 할 수 있다. 학교는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등교하는 기분이다. 식당과 마트는 독일에 위치한다. 해가 저물면 한국말을 하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 잔다. 나는 미국, 한국, 독일 중 어디에 속하는 걸까?
밤새 한국 드리마를 본 우리 엄마는 비몽사몽으로 독일 오트밀 시리얼과 찬 우유를 아침으로 챙겨준다. 엄마는 아침에 찬 우유를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나도 아기 때는 그랬는데 요새는 안 그렇다. 신기하다. 엄마는 독일제 원두커피 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을 뽑아 들고 눈을 떠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나는 오트밀 시리얼을 한 대접 말아먹고 브로첸, 독일 바게트 두 개를 간식 통에 담아 집을 나선다.
이제 나는 미국으로 이동한다. 대만인 친구 윌리엄네 집으로 간다. 아침잠이 많은 윌리엄을 깨워 학교에 같이 갈 것이다. 윌리엄네 집은 우리 집에서 1분 거리다. 나는 1분 만에 미국이다. 미국 유학파인 윌리엄 엄마가 유창한 영어로 나를 맞이한다. 내가 와서야 아침을 먹는 윌리엄을 기다려본다. 윌리엄 엄마가 대만식 완탕 수프를 나에게도 권한다. 나는 아침식사로 따뜻한 음식은 질색이다. 윌리엄도 그럴 터인데 윌리엄 엄마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나를 빌미로 윌리엄은 완탕 수프를 한 스푼 뜨고 일어난다.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윌리엄네 집을 나서자마자 반 친구들이 보인다. 어제 딴 마인크래프트 게임 아이템 자랑해야겠다. 형이 있는 미국인 라이언은 포트 나이트 이야기를 펼치느라 바쁘다. 미국애들은 형제가 서넛인 경우가 많다. 부럽다. 나도 포트 나이트 하고 싶은데 엄마는 못하게 한다. 엄마가 형을 낳아주면 좋겠다. 형 계정으로 포트 나이트 해보고 싶은데.
어느새 홈룸 Homeroom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미국계 국제 학교다. 담임 선생님은 애틀랜타에서 오셨는데, 한국, 중국 등의 국제 학교를 거쳐 여기 독일에 온 지 5년이 넘으신다. 애틀랜타의 쨍한 날씨를 그립다고 말한다. 독일 와서 입양한 닥스훈트' 미키마우스'가 선생님의 유일한 식구다.
아침의 시작은 카펫 타임이다. 15명의 반 친구들이 카펫에 둥글게 모여 앉아 선생님과 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오늘은 곱하기 수업이다. 도대체 곱하기는 언제까지 하는 걸까? 엄마가 지난 방학에 구구단 표를 출력해서 외우게 했다. 외울 때는 지겨웠는데 구구단표를 외우고 나니 홈룸 수업은 달팽이 속도다. 반 아이들도 일주일 정도 한국으로 보내 구구단표 외우면 될 터이다. 홈룸은 한 달째 곱하기다.
독일어 시간이다. 독일어 시간에 영어를 사용하면 벌점이 생겨서 쉬는 시간, Recess에 나가 놀지 못한다. 리세스는 30분이 넘는다. 애들이랑 축구도 해야 하고 축구장 구석에서 포트 나이트에 관한 정보도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독일에서는 독일법을 따르는 착한 어린이가 된다. 일주일에 3번이나 들은 독일어 수업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수업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 ESL 수업은 한국애들이 대부분인데, 한국어를 써서 벌점을 받는 한국애들이 많다. 나는 한국어가 서툴고,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애들 대화에 끼지도 못한다. 한국 아이들이 한국어로 말하다 키득 거리는 것도 기분 나쁘다. 여긴 미국인데 쟤들은 한국을 살아가는 듯하다.
점심시간이다. 이제 독일로 이동이다. 독일어는 싫어도 독일 음식은 맛있다. 카페테리아의 두 가지 메뉴 다 맘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퍽퍽 닭가슴살 구이와 그래비 소스를 끼얹은 Schweinebraten 납작 퍽퍽 돼지고기구이 중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까? 행복한 고민이다. 회, 오징어, 닭다리, 소고기 등심을 싫어하는 내 입맛은 독일이 제격이다. 처음 독일 와서는 내 입에 짠 것들 뿐이라 간이 안 맞아서 거의 먹지 못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적응을 했다. 곁들인 생채소와 구운 감자를 곁들여 덜 짜게 먹는 요령도 생겼다. 독일어는 싫지만 독일 요리는 좋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이동한다. 한국어를 잊을까 봐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는 엄마가 있는 집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 라면 냄새가 난다. 끓인 수프 냄새가 향긋하다.
나는 주말 이틀 중 한 번만 라면을 먹을 수 있다. 엄마가 정해둔 규칙이다. 라면을 좋아하는 아빠는 불만이다. 라면을 좋아하는 나도 엄마의 규칙에 불만이었다. 그런 엄마는 점심으로 혼자 라면을 끓여먹었다. 장보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냉장고 앞에는 엄마가 정리하다만 재료들이 놓여있다. 엄마는 라면 먹은 자취를 감추려 했나 보다. 라면 국을 헹궈낸 냄비가 설거지 통에 있다.
엄마는 내가 눈치챈지도 모르고 장 봐온 건강한 독일 간식거리를 내민다. 카페테리아에서 든든히 먹어 지금은 배가 부른데, 아침에 시리얼만 먹고 갔다며 간식을 연신 권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 학교에 갔다 와서 고생했다는 말투인데, 이해가 안 간다. 난 학교에서 오늘 재미있기만 했는데. 엄마는 잔뜩 장 봐온 것은 두고 왜 라면을 먹었을까? 혼자만 라면을 먹으려는 속셈인가 보다.
나는 한국, 미국, 독일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한국 라면을 끓여주는 엄마와 함께이며, 미국 학교 친구들은 소중하고, 독일 음식은 입맛에 맞는다. 내 나라라 부를 국가를 하나만 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어차피 난 지구인이니까, 249개나 되는 지구 속 나라들 중에서 몇 개든 선택할 수 있다. 3개 정도의 내 나라를 가지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래서 내 꿈은 또 다른 나라를 가보는 것이다. 내 나라의 개수를 더 늘려 보는 꿈은 설렌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한국 라면을 소개해주면 어떨까? 진짜 맛있는데 말이다. 라면 없이 산 인생과 라면 맛을 아는 인생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