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이들 돌 때쯤 한국에서 유럽으로 발령이 났을 때에는 4년 뒤 한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녀는 20년째 독일에 살고 있고, 남편은 독일에서 퇴임을 할 예정이며, 그녀의 두 딸은 독일 내에서 입학성적이 높기로 유명한 마인츠 공대를 졸업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재독 15년 차였으니 나에겐 독일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없어 보였다. 그녀 또한 한국화 선생님처럼 나와는 접점이 없다. ( 독일에 아지트 하나쯤 갖고 싶다 #1 참고) 당시 그녀의 아이들은 현지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나보다 10살 정도는 연배가 있었다. 우리 둘 다 종교생활을 하지 않아 재독 한인들의 주요 모임터인 교회나 성당에서 서로를 만날 수 없다. 호박씨는 어떻게 그녀와 친해졌을까?
독일 온 지 석 달 정도 된 이른 봄이었다. 법인 사모님이 자전거 나라 투어가 있으니 애들 픽업 시간을 4시 정도로 늦출 수 있냐고 물으신다. 법인 사모님이란, 남편이 주재 나와 있는 현지 법인의 법인장님 와이프분을 말한다.
자전거 나라 투어가 뭘까? 호박씨는 자전거도 못 타는데, 사모님이 타라고 하면 자전거도 타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자전거 나라는 당시 붐이던 지식형 가이드 투어 회사의 이름이었다. 작명 센스는 별로다. 자전거와 나라와 가이드 투어는 연결 지어 연상하기 쉽지 않았다.
자전거 나라 투어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로마, 파리, 런던,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국어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주요 도시의 관광지들을 걸어서 또는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면서 한국인 가이드 분이 한국어로 관광지에 대한 지식을 설명해준다. 아는 만큼 보이는 유럽여행에서 한국어 가이드는 유용하기 그지없다. 그런 자전거나라가 프랑크푸르트를 포함한 독일에도 지사를 세우고 가이드 투어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오프닝 기념으로 100명에게 프랑크푸르트 무료 이벤트가 제공되었다. 이런 행사 소식은 교민분들과 한인교회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사모님은 교회 모범생이셨고, 무료 투어 자리가 하나 더 남으니 나에게도 기회를 챙겨주신 거였다.
작은 아이의 유치원 일정은 매일 2시에 끝나는데 자전거 나라 투어는 4시에 끝났다고 한다. 키즈 클럽이라는 국제학교 유치원에서 제공하는 방과 후 돌보미 서비스를 유료로 이용하면 된다. 키즈클럽은 5시 30분 정도까지 운영되었으니 4시에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투어가 끝나고 고 U반,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면 픽업에 무리는 없다. 하지만, 작은 아이가 여전히 아침마다 울며 유치원을 갈 때라 아이가 눈에 밟혔다.
법인장님 사모님이 제안하신 바를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서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박씨는 온 지 3개월 된 신입 주재원 와이프이니 '안 갈게요' 하기 힘들다. 사모님들 세분이 재독 기간 동안 지나셨는데, 재독의 낯섦에 호박씨가 긴장한 것에다가 첫 번째 사모님의 성격이 호박씨와는 다르게 강단 있으셔서 지레 호박씨는 사모님을 어려워했다. 늘, YES가 정답인 듯했다. 게다가 아침 시간에는 투어 시작점인 시내까지 데리러 오시겠다고 까지 하신다. 눈치 레이더를 세워 보니 가는 게 맞다.
투어 날 아침, 작은 아이에게 키즈클럽은 재미있을 것이니, 놀고 있으면 어느새 엄마가 올 것이라 일러두었다. 키즈 클럽을 처음 이용해 보는 것이라 홈룸 선생님께도 아이를 키즈 클럽실로 인도 부탁드린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사모님의 차를 기다렸다.
사모님은 본인 차가 아닌, 교회 친구분의 차를 타고 오셨다. 먼저 교민 1번 부부는 사모님의 교회 친구이셨고, 교민 2번 인 다른 한분은 사모님도 모르는 이 교민 1의 친구분이었다. 그리하여 차 안에는 내가 아는 이가 한 명인데 심지어 그것이 법인 사모님인 상태다. 말수가 적으신 사모님께는 뭐가 말 건네기가 어렵다. 교민 1분은 경쾌하신 성격이시고, 교민 2분은 침묵을 지키시며 교민 1의 이야기를 들어주기에 능하신 분 같아 보인다. 가이두 투어 시간 내내 걸어야 한다기에 넉넉히 챙겨 온 생수만 말없이 마시고 있으려니 멀미도 났다.
금융과 교통의 허브인 프랑크푸르트는 관광객에겐 돈 구경을 시켜주진 않을 테다. 돈을 들고 나온다면 모를까 돈 냄새만 맡고 나온다고 좋을 것도 없다. 교통의 요충지니 다녀가긴 편하지만, 머무르면서 볼거리가 없다. 유럽 중앙은행 건물 앞에서, 도이치 뱅크 빌딩 앞에서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고 하는 것이 관광객들이 유럽여행서 가장 기대하는 바는 아니다. 관광이라 함은 이색적이거나,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돈과 일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거늘, 프랑크푸르트 투어는 주요 테마가 돈과 공항이다.
그날 투어가 나에겐 신선했기에 이후 대부분의 다른 유럽 자전거 나라 투어를 체험해보았다. 회가 거듭될수록 프랑크푸르트는 가이드 투어가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사는 도시였으니 그렇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생긴 지 5년 만에 프랑크푸르트 투어는 사라졌으니 호박씨의 의견이 일리는 있다.
가이드분을 따라다니며 오전 코스인 Römer뢰머 광장 주변의 프랑크푸르트 도심을 돌았다. 사모님은 독일 오신 지 2년 차 이셨고, 가이드 투어의 다른 참가자분들은 한인 교회의 교민이 대부분이다. 나에게는 새롭고 조심스럽기만 한데, 다들 그렇지 않은 눈치다.
Kleinmarkthalle, 뢰머 광장 맞은편 재래시장을 방문할 차례였다. 차범근 감독이 아인트라흐트 frankfurt 차붐 시절에 단골이었다는 정육점 앞에 가이드가 섰다. 가이드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한글 메뉴판에 온 신경을 뺏겼다. '불고기'라고 쓰여있는 한글에 흥분했다. 3개월 동안 내가 찾던 것이 불고기감이다. 독일 슈퍼에 널린 것이 덩어리형 스테이크 고기인데 나에게는 썰은 고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이드분 자리를 옮기시려 한다. 따라가야 하나, 사야 하나. 지금 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교민 2분이 나에게 다가온다.
" 1킬로 사봐요. 이 가게가 조금 비싸긴 한데 맛있어요."
다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분위기인데 그녀는 옆에 잠시 머물러 준다.
정육점 직원이 고기 써는 기계로 살짝 얼은 소고기를 얇게 썰어준다. 얼마 만에 만나는 얇은 고기인가! 불고기가 아니라 샤부샤부로 해 먹어야겠다. 키즈 클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꼬마가 좋아하는 메뉴다. 고기 썰기를 기다리면서 정육점 건너 야채가게 가판을 쳐다보니 교민 2분이 또 말을 걸어준다.
" 이거 명이나물인데, 지금만 잠깐 나오는 거니까 사가서 장아찌 담가먹어요."
아! 명이나물이 이렇게 생긴 거구나. 먹는 것에서 눈을 떼고 교민 2분을 바라보았다. 음성은 차분하고, 표정은 독일인과 비슷하게 변화가 적다. 내겐 한국인과 독일인의 접점 같아 보이는 그녀는 나에게 뭔가를 알려준다.
멋있다. 호박씨는 그날 마음먹었다. 1년 후 아니 지내는 내내 동안 나도 처음 오는 누군가에게 그녀처럼 이로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각자 점심을 해결하고 1시간 후에 뢰머광장에서 다시 투어팀이 집합한다. 사모님과 교민 1,2 분들의 뒤를 따라 Zeil 백화점 푸드코트로 들어갔다. 퓨전 아시안 음식점에 따라 들어갔는데 교민 2번 분이 마침내 옆에 앉으셨다. 3시간을 걸었으니 목도 마르고, 다리도 피곤하다. 그녀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겠다. 가방 속 생수 한 병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식당에 물이 마트보다 3배 넘게 비싸더라고요. 이거 드세요. 새 거예요."
차분히 그녀가 말한다.
" 독일은 물을 파는 식당에서 마트 물병을 꺼내면 실례예요. 매너니까 기억해두고, 생수 병은 일단 넣어둬요."
방금 전 사모님께도 생수병을 꺼내어 건데 드렸는데 이런 원인으로 사모님도 됐다고 말씀하셨던 거였구나. 것도 모르고 여러 병을 꺼낸 손이 부끄러워진다. 그녀는 내가 뭘 모르니 알려주었고, 이제 차분한 그녀의 팁을 따르면 된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식당에 가면, 생수병은 물론이고, 아이들 뽀로로 음료수도 꺼내 먹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익숙한 습관이 여기에선 매너에 어긋난다.
점심 후, 2시간의 오후 투어가 끝나자 올 때와는 다르게 U-Bahn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타보는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이었다. 교민 2번 분에게 연락처를 받고 싶었는데, 말할 틈을 잡지 못했다. 그녀가 나와 연락을 하고 싶을지 아닐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아이를 데리러 가기로 한 시간이 이미 지나서 마음이 다급했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가 나오든 그 비싸다는 독일 택시를 타고 아이를 보러 가고 싶기도 하고, 지하철 정거장으로 달음질쳐 집으로 향하고 싶기도 하다. 택시도 부를 줄 모르고, 지하철도 탈 줄 모르면서 마음은 아이 곁에 이미 가 있다.
사모님 댁이 나의 독일 집에서 지척이니 3호선을 함께 타고 돌아가면 되는데, 이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나에겐 사모님이 조심스럽다. 사모님 발걸음에 맞춰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공짜 시내 투어 자리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장 본 거리로 저녁을 해 먹어야겠다고 감사를 표시해본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만났다. 정신없이 갔는데 다행히 아이가 " 엄마, 안녕." 하며 반긴다. 아이의 바지가 바뀌었다. 혼자서 바지를 갈아입어서 대견하다 했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속옷과 아침에 입고 간 바지가 들어있다.
" 엄마, 나 오줌 쌌어. 화장실 가서 갈아입고 가방에 넣어 뒀어. 잘했지? "
그러고 보니 오줌이 젖은 속옷과 바지는 둘둘 말려 가방 안에 들어있다. 석 달 전 5살 작은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실수를 했었더라면, 보육교사님이 개켜 비닐에 넣어 주시고, 데리러 간 나에게 살짝 일러주셨겠지. 영어를 하지 못하니 아이 스스로 여벌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 넣기까지 했다. 닥치니 혼자 해낸다 싶어 대견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커녕 아이의 지린내 나는 옷을 쥐고 울었다. 긴장과 어설픔 속의 긴 하루는 나에게만은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10배속으로 흘러 아이와 내가 처한 독일이 순식간에 익숙해졌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렇게 눈물 젖은 빵과 같은 실패의 스토리냐면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가이드 투어를 한 2주 뒤, Main Taunus Zentrum 쇼핑몰에 간다. 국제학교 준비물이 나오면, 계속해서 갸우뚱했다. 이게 어떻게 생긴 것인지 어디서 구해야 하는 것인지 일일이 홈룸 선생님께 물어야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에 가면 다음 주 준비물인 비옷을 구할 수 있겠지 싶었다. 어린이 비옷은 이 나라 어디서 팔려나 하던 때에 그녀가 나타났다.
" 잘 지냈어요? 이렇게 만나네요. "
교민 2이셨다.
그녀의 옆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그녀의 딸도 있었다. 표정이 크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 반가움이 엿보인다. 나도 우연한 이 만남이 좋다. 그제야 우린 통성명을 했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내게 연락처를 물어주었다. 나도 용기를 내어보았다.
" 비옷은 어디서 팔까요? "
그녀에게 또 도움을 요청하며 기대어본다. 왠지 그녀는 기대도 되는 사람인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녀를 롤모델 삼아 지질한 독일 라이프 말고, 몸에 익은 독일 라이프를 살아가는 우아하고 매너 있는 호박씨가 되어보리라 먹었던 마음을 다시 챙겨 왔다. 그렇게 주재민과 주재원은 친구가 되었다. Happily ever af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