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교에 맨디는 한 명뿐인 대만인이었다. 한국인이 많아서 좋겠다며 맨디는 부러워하곤 했다. Bookstore북 스토어에서 맨디와 함께 일을 하고 있으면, 한국인 엄마들이 종종 다가와 맨디에게 한국말을 걸었다. 맨디의 생김새도 한국인처럼 보이긴 하고, 단짝인 호박씨랑 늘 붙어 있다보니 그녀를 한국인으로 오해할 만하다.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도 한국인들이 맨디에게 한국말을 건넨 경험이 있다고 그녀가 말해주었다.
맨디의 외로움은 사실 나에겐 기회이기도 했다. 영어밖엔 소통할 길이 없는 대화친구가 생겼으니 실전영어 연습이 생존인 호박씨에겐 신날 일이었다. 그녀와는 장 보러 가거나, 아시안 음식점을 가기도 편했다. 북스토어 업무가 끝나는 2시 정도는 아이들을 픽업하기에 한 시간여 남짓 남은 시간이라 우리는 오버 오젤 시내에 있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이미 그녀는 나보다 더 오버오젤 한식당의 단골이기도 했다.
옆집 살던 거구의 미국인 가족이 이사를 가고 한동안 옆집은 비어있었다. 옆집 독일인 주인은 나만 마주쳤다 하면 새로운 한국인 주재원이 없냐며, 소개를 부탁하곤 했다. 그러다, 안드레아가 이사 왔다.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아이들이 등교하는 날. 큰 아이는 데려다주는 것은 질색이고, 작은 아이는 오히려 데려다주길 절실히 원해 눈만 보이는 두툼한 잠바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작은 아이와 학교로 나선다. 학교까지 뛰어가면 1분 거리다. 학교 정문을 나와 두 번째 집이 우리 집이니 사실 데려다준다는 것의 의미는 없다고 봐도 좋은데 딸아이의 고집을 꺾을 순 없다.
현관을 나서는데 옆집에서 소리가 들린다. 옆집에 누가 이사 왔나? 계단 아래로 검은 머리가 힐긋 보인다. 따라 나서 보니 방금 우리 집에서 보았던 검은 머리의 그녀가 본인과 비슷한 키의 아들을 학교로 향하고 있다. 아들의 머리는 어두운 금발인데 엄마는 영락없는 아시안이다.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구나. Upper 스쿨에 다닌 법한 아이와 함께 학교를 향하고 있으니 오늘이 첫 날인 게다.
둘째를 교실에 내려다 주고 집을 정리한 후 북스토어로 향했다. 북스토어 당번 날이었다. 맨디가 먼저 와서 열어 두어 고맙다 싶은 찰나에 낯익은 뒷모습을 한 부부가 맨디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디서 본 뒷모습이지? 카운터 건너 북스토어 안으로 들어가니 맨디가 카운터 밖으로 머리를 반쯤 내밀고는 영어가 아닌 언어를 하고 있다. 맨디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 소개하게. 드디어 학교에 대만인이 오셧어!"
그녀의 이름은 Andrea다. 안드레아 옆에 서 있는 그녀의 남편은 독일인이다. 이 부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왔다고한다.
연이은 대만어 타임에 신나 보이는 맨디가 나에게 외친다.
" 호박씨 옆집에 산대!"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불길한 게 무어냐고?
외로운 절친이 드디어 그리운 자기 나라 사람을 만났는데 호박씨가 불안할 게 뭐 있게는가?
새로 전학 온 아이가 내 절친하고 알고 보니 가족인 거다. 그래서 내 절친은 전학 온 아이와 나보다 더 끈끈한 관계인 것이다. 호박씨는 단발머리 교복의 고등학생 쯤으로 변신했다. 나만의 단짝이여야하는데 ....
얼마 만에 나누는 대만어 대화인가 싶은 행복의 기운이 맨디를 감싸고 있다. 그렇고도 남을 일이다. 맨디는 외로웠으니다. 절친의 외로움을, 그리고 나는 메꿔주기 힘든 그 틈바구니를 익히 느끼고 있었다.
이제 호박씨의 영어 친구 맨디는 안드레아랑 대만어로 수다 떨며 장 보러 다니고, 점심 먹으러 다닐 것만 같다.
안드레아 옆에서 꿔다 놓은 보리 자루처럼 대만어를 듣고 있던 남편이 내게 악수를 청한다. 이웃이 되어 반갑다며 그가 미국에 살다 왔다며 자기소개를 한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귀독 이유를 설명한다.
"트럼프가 당선이 돼서 미국에서 나와겠더라구요. 하하하. 망할 X의 트럼프!"
PH. D 의사의 커리어를 가진 안드레아의 독일인 남편이 트럼프 때문에 자신의 나라에 돌아왔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나에게 " 뭔지 알지?" 하는 표정으로 눈을 징긋하며 트럼프 탓을 한다.
이게 다 트럼프 때문이란 말이지!
미국인들이 많은 국제학교가 한동안 미국 대통령 선거로 떠들썩할 때에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회색분자 호박씨는 이런 나비효과를 상상도 못 했다. 독일살이에서 처음 생긴 나의 절친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뺏기고 있는 이 상황의 원인 제공자는 그놈의 미국 대통령 때문이라는 거다.
칼슈타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한 시간 걸리는 남서쪽에 있는 도시로, 와인 산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트럼프 집성촌이 있어 트럼프 빵집, 트럼프 레스토랑 등을 발견할 수 있다. 트럼프 집성촌 이어도 당선 시에는 트럼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 칼슈타트는 그 흔한 당선 축하 플랫카드는 고사하고, 트럼프 마을이냐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싫다며 트럼프 친척 아닌 척들을 하며 산다고 보도되었다.
선거철이 되면, 나의 다정한 이웃 안드레아를 떠올린다.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호박씨와 안드레아는 정치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맨디, 안드레아, 호박씨, 여자 셋이 잘 지낼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면 다음 편을 기다려주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