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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먹는 시간

홍시. 추억을 먹는 시간

by 볕뉘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는 ‘감나무 패권’이라는 게 있었다. 학교 운동장도 아니고, 동네 문방구도 아니고, 기가 막히게 마을 한복판에 서 있던 그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가을이 깊어 홍시가 익어가기 시작하면, 누가 더 빨리 하나라도 먹느냐는 아주 진지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 시절의 나는 어찌나 홍시에 진심이었는지, 보통 애들은 학교 갈 준비 다 하고 집을 나설 때쯤 일어났지만
나는 홍시 먹겠다고 해 뜨기도 전에 일어났다. 아침잠이 많아 겨울잠 자는 곰과 비교되던 내가 말이다.

애들 사이에는 홍시가 익는 순간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홍시 요정’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내가 감나무 주변을 서성거리며 “응? 이거 어제보다 더 물렁해졌네?”라고 혼잣말을 하면
다른 애들은 슬슬 모여들었다. 마치 참새떼가 떨어진 감을 노리듯, 우리도 감나무 아래서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나 홍시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과일이었다.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여도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면 “아직이야.” 하듯 딱딱했고, 어느 날은 너무 잘 익어서 만지기도 전에 스르르 터져 손바닥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그래도 그때 우리에게는 묘한 신념이 있었다.

‘이 감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면 언젠가 분명히 최고의 홍시 하나가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걸 ‘운명의 홍시’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유치한가 싶지만, 그 시절엔 그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가장 웃겼던 건, 우리가 그렇게 심각하게 감나무를 지키고 있어도 정작 나무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는 거다.

바람 불면 떨어지는 거고, 안 불면 안 떨어지는 건데 우리는 마치 감나무가 우리 중 누구에게 줄지 고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왔다.

“떨어졌다!!!”
어느 친구의 외침과 동시에 우리 여섯 명은 일제히 그 감 하나를 향해 달렸다.
뛰어가며 서로를 밀지는 않았지만 ‘내가 먼저!’라는 기세로 팔을 쭉쭉 뻗었다.
결국 그 홍시는, 슬리퍼 한 짝이 벗겨져도 아랑곳하지 않던 내 손으로 들어왔다.

승리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손안에 있던 홍시는… 이미 너무 익어서 잡는 순간 훅 터지며 손가락 사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애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나는 주황빛 손바닥을 허공에 흔들며 소리쳤다.

“아니야! 아직 먹을 수 있어!!”

그러고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며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사실 반쯤 이상은 이미 손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과일보다 달았다.
그 달콤함은 감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뛰고 웃고 기다린 시간들이 농축된 맛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감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걸 배웠는지도 모른다.
아직 덜 익은 홍시는 떫고, 너무 익은 홍시는 쉽게 터지고, 딱 맞는 순간은 생각보다 짧다는 교훈.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참 오래도 머물렀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도 그런 것 같다. 너무 급하게 잡으려 하면 떫고 너무 늦게 오면 손끝에서 스르르 흘러버리는 순간들. 그래도 아침잠 많은 아이들이 감나무 아래에서 운명의 홍시를 꿈꾸며 기다렸듯 우리도 언젠가 ‘지금이다!’ 싶은 순간을 만나기 위해 오늘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주황빛 홍시를 보면 그때 동네 골목에서 서로의 잠옷 바람을 보며 웃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중 아무도 홍시를 제대로 챙겨 먹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분명 가을을 통째로 먹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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