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조직 단원
살다 보면 참 신기한 일들이 많다. 분명 내 집이고, 내가 매일같이 오가며 손때 묻힌 곳인데도 꼭 필요한 순간에만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들이 있다. 평소엔 자리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멀쩡히 굴러다니더니, 정작 급해지는 순간이 오면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잠적해 버린다. 마치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사는 작은 요정들이 장난치듯 말이다.
평소에는 너무 멀쩡하게 굴러다녀서 존재감조차 없지만, 내가 급해지는 순간이면 단체로 사라지는 묘한 팀이다. 그 핵심 단원은 도장, 가디건, 바늘, 실, 그리고 손톱깎이. 이 다섯 가지는 마치 나를 시험이라도 하듯 꼭 필요할 때만 잠적하는 데 탁월하다.
도장은 이 조직의 에이스다. 평소에는 책상 모서리, 가방 구석, 서랍 속 등 어디든 있는 듯 없는 듯 느긋하게 쉬고 있다. 그러다 “도장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도장은 곧장 잠행 모드로 들어간다. 서랍을 뒤집어도, 가방을 탈탈 털어도 없다. 내가 숨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쉴 때쯤이면 비로소 나타난다. 그것도 너무 당당한 모습으로. 마치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난 원래 여기 있었는데?”라고 말하는 듯하다.
가디건은 도장을 능가할 만큼 영리하다. 날씨가 애매하게 추워져서 “오늘은 가디건 하나 걸쳐야겠다” 싶은 날이면 가디건은 자취를 감춘다. 분명 지난주엔 눈앞에 보였고, 어제만 해도 옷걸이 끝에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존재감을 풍겼던 녀석인데, 그날만큼은 흔적도 없다. 반면, 덥고 땀나는 한여름엔 왜 그렇게도 잘 보이는지. 옷장은 나보다 먼저 계절을 알아채는 걸까? 아니면 가디건이 계절을 조종하는 걸까? 가끔 헷갈릴 정도다.
바늘과 실은 이 조직의 스파이다. 작고 조용하며, 은밀하게 움직인다. 단추 하나 달아야 하는 급박한 순간이면 이미 잠입을 마친 뒤다. 분명 재봉 상자에 넣어둔 것 같은데, 열어보면 상자는 텅 비어 있다. 그 작은 존재감이 얼마나 완벽하게 사라지는지, 매번 놀랄 따름이다. 그러다 며칠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닥 한쪽에서 발견된다.
“그날 그렇게까지 급했어?
이런 표정이라도 짓는 듯하다.
손톱깎이는 조직의 브레인이다. 평소엔 욕실 찬장, 화장대 서랍 등 어디에 둬도 잘 보인다. 그런데 꼭 외출 직전, 손톱이 미세하게 걸려서 하나만 정리하면 될 것 같은 그날, 손톱깎이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평소엔 넘쳐나던 손톱깎이가 그날만큼은 집 안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발견된다. 그것도 사용 흔적을 남긴 채 말없이 앉아 있다. “네가 날 찾기 전에 이미 한 명 처리했어.” 하는 스파이 영화 대사 같은 분위기로.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한다.
사라지는 건 물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여유, 내 평정심, 나의 침착함도 급한 순간이면 단체로 도망간다. 손톱깎이가 사라졌다고 허둥대며 온 집안을 헤집는 동안, 가장 먼저 달아난 건 사실 내 침착함이다. 바늘과 실이 보이지 않는 순간, 내 인내심은 이미 현장을 이탈한다.
그런데 웃긴 건—사라진 물건들은 결국 돌아온다는 것이다.
숨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예상치 못한 순간에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다 찾았어? 이제 좀 진정됐어?” 하고 묻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닫는다.
이 장난 같은 실종 사건들이 사실은 나에게 나직한 신호였다는 것을.
‘조금만 천천히 해도 괜찮아.’
‘급하면 더 안 보이는 법이야.’
‘숨 한번 고르면 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도장이 숨는 날은 서류보다 마음이 급했던 날이고, 가디건이 사라진 날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운 날이었다. 바늘과 실이 없어 당황한 날은 내 집중력이 흩어진 날이고, 손톱깎이가 잠적한 날은 사소한 것까지 완벽하고 싶었던 날이었다.
결국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들은,
정말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조급해서 못 보고 있었던 것뿐.
그래서 이제는 물건이 하나 실종되면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그래, 숨어 있어도 괜찮아.
내가 조금 여유를 되찾으면
너도 결국 나타날 걸 알고 있으니까.”
급할 때마다 숨어버리는 것들의 목록은,
결국 나에게 말해주는 작은 인생 수업이다.
서두르지 말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필요한 것들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