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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익어 가는 시간.

그리움이 스며드는 시간.

by 볕뉘

가을이 깊어져 갈수록 들녘은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다. 바람은 서늘하고 하늘은 높으며 산자락마다 밤송이가 한가득 매달려 있는 계절. 어린 시절 밤은 돈을 주고 사 먹는 간식이 아니었다. 뒷산만 오르면 널린 것이 밤나무였고, 그저 손을 내밀면 제철의 달콤함이 떨어져 내렸다.

손에 바구니를 들고 엄마와 함께 산길을 오르던 날들. 장화를 신고 흙냄새 가득한 길을 걸을 때면 마음은 항상 신나 있었다. 바람이 흔드는 나무 사이로 익은 송이가 떨어질 때, 그 소리는 어린 마음을 설레게 하는 신호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놀이를 하는 시간.

엄마는 늘 앞장서서 송이를 살피셨고, 나는 뒤따라가며 발끝으로 톡 하고 건드렸다. 벌어진 틈 사이로 윤이 나는 밤알이 모습을 드러내면, 마치 작은 별을 손에 쥔 듯 기뻤다.


이제는 그 시절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도 문득 가을바람이 스치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바구니 가득 담긴 밤, 온 집안에 퍼지던 고소한 향기, 그리고 그 곁에서 들리던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

밤을 삶아 주시던 엄마는 이따금 말씀하셨다.

“사람도 밤처럼 껍질이 아무리 가시여도 속은 별 같아. 다들 자기 안에 단맛을 품고 살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른이 되어 밤송이를 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른다. 세상살이의 가시에 찔리며 스스로 가시를 세워도, 그 안에는 여전히 다정함이 숨 쉬고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밤은 가을의 맛이지. 제철에 먹어야 영양도 많고 맛도 깊어. 사람도 제 시절을 잘 살아내야 한단다. 서두르지도, 늦지도 않게 때를 맞추는 게 가장 지혜로운 삶이야.”

그 말을 깨닫게 된 건 훗날이었다. 삶에도 ‘익어 가는 속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시절. 서두른다고 더 빨리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늦는다고 뒤처지는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계절 속에서 제맛을 내는 시간이 따로 있다는 걸, 엄마는 밤을 통해 가르쳐 주셨다.

세상살이가 밝은 것이 아니라 엄마가 내게 비추었던 세상이 아름다웠던 시절. 마음만은 가장 밝은 곳에 있도록 사부작사부작 키워내던 거친 손마디가 그리운 이 밤. 그 모든 계절이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알아버린 철부지 딸.

‘엄마’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 한편에 눈송이가 흩날린다. 서러운 마음에 눈이 내리고,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엄마, 나는 오십이 넘어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 왜 이렇게 어설프고 못나게만 느껴질까.”

그때 엄마는 고요히 웃으며 말했다.

“볕뉘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살아가. 그런데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너를 알고 있다는 뜻 아닐까? 인생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다 가시를 지나야 해. 하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단맛이 있지. 그러니 용기란 녀석과 희망이란 녀석을 곁에 두고 살아가렴.”


그 말은 이제 별이 되어 마음에 빛난다. 상실의 시간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삶의 무게에 눌릴 때마다 그날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 목소리, 그 온기는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숨 쉰다.

사랑하는 이의 멈춘 시간으로부터 생의 온기를 이어받아 걸어가는 일.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세상에 다시 흘려보내는 방법임을 안다. 엄마의 빈자리를 억지로 채우려 애쓰기보다, 엄마가 남겨 준 마음을 삶에 스며들게 하고, 다정함을 다른 이에게 건네는 일. 그것이야말로 엄마를 기억하고, 여전히 사랑하는 가장 온전한 방식일 것이다.

나는 가시가 있어도 밤이고, 누군가에게는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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