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맛, 글을 쓰는 이유

삶이 건네는 희망

by 볕뉘


가을은 늘 조용히 온다. 여름처럼 요란하지도, 겨울처럼 단호하지도 않다. 대신 충분히 기다린 것들만 데려온다. 햇볕을 오래 견딘 과일의 단맛, 바람에 닳아 부드러워진 잎사귀의 가장자리, 말수가 줄어든 사람들의 표정 속에 스며든 깊이. 글을 쓰는 순간의 마음도 꼭 가을과 닮아 있다. 오늘 하루치의 행복이 서두르지 않고 숨을 고르는 시간. 마치 잘 익은 사과를 베어 무는 순간처럼, 삶의 가장 달콤한 부분이 뒤늦게 입안에 퍼진다.

글을 쓴다는 건 늘 그렇게, 삶이 내어주는 생의 맛을 머금는 순간이다.


삶은 때로 예고 없이 무너진다. 죽음이란 나이가 들어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생의 마지막 여정쯤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나에게, 어느 날 그것은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듯 불쑥 찾아왔다. 암 수술대 위에서, 또 소중한 가족의 죽음을 마주했던 그 계절 속에서 나는 끝없는 계절을 걸었다.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도 빛은 없었고, 깊은숨조차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 같았다. 웃음은 오래전 계절처럼 사라졌고, 식탁 위의 밥 한 숟가락마저 목에 걸렸다. 그때의 나는 아직 익지 않은 열매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생의 상실 앞에서 더 이상 휩쓸리고 깎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그렇게 문장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아픔을 숨기지 않고 꺼내어 햇볕에 내어놓는 일. 그것이 글쓰기의 첫걸음이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몸 어딘가에 남아 나를 짓눌렀다. 슬픔은 눈물보다 먼저 체온을 낮췄고, 두려움은 잠들기 전마다 이불 끝에서 발목을 당겼다.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하루를 버텼지만, 문장을 적는 동안은 숨이 조금씩 돌아왔다. 단어 하나를 놓을 때마다 얼어붙은 마음에 금이 갔고, 그 틈으로 미약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글은 나를 단번에 구해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하루치의 삶만큼은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늘을 넘기면 내일이 온다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다시 믿게 해 주었다.


회복이란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반복이라는 것을 글을 쓰며 배웠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꺼내놓는 일. 오늘을 쓰는 문장, 내일 다시 연필을 드는 일, 글은 말해주었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글을 쓴다는 건, 삶이 건네는 계절을 천천히 받아 적는 일이 되었다. 아직 떫은 마음을 억지로 삼키지 않고, 충분히 익을 때까지 곁에 두는 일이다. 가을의 모든 것은 충분히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단맛을 낸다. 글도 그렇다. 아픔을 급히 정리하지 않고, 슬픔을 미화하지 않으며, 다만 그 자리에 머물러 기록하는 일. 그 시간이 겹겹이 쌓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쌓여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든다. 회복이란 다시 웃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흔들리는 날들의 무게를 그대로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의 힘,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계절을 건너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익어가는 계절에 나는 오늘도 쓴다. 완성되지 않아도, 서툴러도 괜찮다. 글은 언제나 한 박자 늦게, 그러나 정확하게 따라온다. 그렇게 쓰는 동안 삶은 다시 한번 말을 건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직 늦지 않았어.”
그 말을 믿으며, 오늘의 문장을 천천히 베어 문다.

KakaoTalk_20251012_204240827_04.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악마와 천사의 속삭임